편견과 싸운 20년…마침내 철문을 열다

입력 2021-03-23 06: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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미국영화 ‘미나리’(감독 정이삭)로 다양한 영화제를 휩쓴 끝에 미국 아카데미 여우조연상 후보에 오른 배우 윤여정. 사진제공|후크엔터테인먼트

윤여정 계기로 본 한국배우들의 할리우드 도전사

2000년대 ‘올드보이’ ‘서편제’ 수상
전지현·이병헌·비 등 할리우드 진출
아시아배우, 액션영화 한정적 역할만
이후 김윤진·배두나·하정우 등 두각
작년 ‘기생충’ 이어 ‘미나리’ 언어장벽 깨
배우 윤여정이 올해 미국 아카데미 여우조연상에 지명됐다. 한국배우로는 최초의 일이다. 작품·감독상 등 모두 6개 부문에 후보로 오른 미국영화 ‘미나리’의 성과이지만, 한국배우의 세계적 위상을 다진 또 하나의 ‘역사’로 평가받는다. 1990년대 후반 이후 다양한 경로와 방식으로 할리우드 등 세계시장에 진출해온 배우들의 노력도 그 바탕으로 꼽힌다. ‘전인미답’처럼 보였던 할리우드를 겨냥한 배우들의 잇단 도전이 최근 20여년 동안 이어져왔다. 인종과 지역이라는 차별과 편견을 딛고 아카데미상과 할리우드의 문화적 변화까지 이끌어내고 있다. 배우들이 걸어온 그 길을 따라간다.

아직, 액션의 시대
1990년대 후반부터 해외에서 불기 시작한 한류의 영향과 한국영화의 해외 성과, 특히 ‘올드보이’ ‘서편제’ 등 영화의 칸 국제영화제 수상은 할리우드의 한국영화에 대한 관심 속에 배우들에게도 명성을 안겨주었다. ‘블러드’의 전지현, ‘워리어스 웨이’의 장동건, ‘지.아이.조’ 시리즈의 이병헌, ‘닌자 어쌔신’의 비(정지훈) 등이 이에 힘입어 할리우드를 비롯한 세계시장에서 활약했다.

하지만 1960∼80년대 리 샤오룽(이소룡)과 청룽(성룡)으로 상징되는 아시아권 배우들을 내세운 액션영화의 ‘그늘’에서 벗어나지 못했다. 실제로 위에 언급한 작품들도 그렇다. 현란하고 호쾌한 액션연기의 분위기와 몸짓이 서구의 그것과는 달랐기 때문이다. 또 세계 최대의 영화시장인 미국을 비롯해 해외시장이 아시아권 더욱이 한국배우에 대해 본격적으로 인식하지 못했던 때였다.

ABC 드라마 ‘로스트’에 출연한 배우 김윤진(왼쪽).


연기와 언어로 승부하다
같은 시기 한국배우들의 연기와 이미지에 주목하게 한 사람이 있다. 김윤진이다. 그는 미국에서 자라나 공부하며 현지 연극무대를 통해 쌓은 연기력에 영어 소통 능력을 덧댔다. 스스로 영화·드라마 제작사 등에 끊임없이 프로필을 건네고, 숱한 오디션에 응한 끝에 2004년 ABC 드라마 ‘로스트’에 주요 배역으로 출연했다. 이후 2013년 현지 드라마 ‘미스트리스’의 당당한 주연이 되어 2016년까지 시리즈를 이어갔다.

배두나도 2009년 일본 고레에다 히로카즈 감독의 ‘공기인형’을 칸 국제영화제에서 선보인 뒤 할리우드의 주목을 받았다. 3년 뒤 릴리·라나 워쇼스키 자매 감독의 ‘클라우드 아틀라스’에 출연하며 미국드라마 ‘센스8’ 시리즈의 주연으로 활약했다.

2007년 하정우는 할리우드 스타 베라 파미가와 함께 한미합작 영화 ‘두번째 사랑’에 출연했다. 저예산의 예술적 감성으로 할리우드와 손잡은 보기 드문 사례로 꼽힌다.

배우들의 활약은 이후 한국배우에 대한 할리우드의 인식을 바꾸기 시작했다. 칸을 비롯한 유수의 영화제 수상 성과는 물론 리메이크와 합작 등 다양한 방식의 한국영화 할리우드 진출에 힘입기도 했다.

영화 ‘기생충’. 사진제공|CJ엔터테인먼트



보편적 감성으로 할리우드 중심에

이 같은 흐름 속에서 2018년 영화 ‘크레이지 리치 아시안’의 흥행은 한국을 비롯한 아시아권 배우들을 바라보는 할리우드의 시선에 커다란 변화를 이끌어냈다. 량쯔충(양자경) 등 출연진이 모두 아시아권 배우들로, 그들의 문화와 언어를 전면에 내세워 흥행 돌풍을 일으켰다.

지난해 ‘기생충’이 작품상 등 아카데미 4관왕을 차지한 것은 여기에 쐐기를 박았다. 비영어권 아시아 영화에 최고 영예를 안기며 “1인치(자막)의 장벽을 뛰어넘으면 더 많은 영화를 즐길 수 있다”는 봉준호 감독의 말을 각인시켰다.

언어는 더 이상 문제가 되지 않았다. 실제로 올해 ‘미나리’의 성과가 입증한다. 연출자 정이삭 감독은 미국 이민 한인가족의 이야기를 “그들만의 언어로 말하려 노력하는 가족의 이야기”이라면서 “영어나 어떤 외국어보다 깊은 진심의 언어이다”고 말했다. 언어를 뛰어넘어 보편적 감성이 전 세계적으로 통할 수 있음을 다시 한번 내어보였다.

이를 토대로 한국배우들의 할리우드행은 이어지고 있다. 11월 개봉하는 마블스튜디오의 ‘이터널스’에 안젤리나 졸리 등과 출연한 마동석은 할리우드와 손잡고 “새로운 액션영화”를 선보이기로 했다. 2019년 주연작 ‘악인전’의 할리우드 리메이크도 추진 중이다.

넷플릭스 등 OTT 유통망의 급격한 확산세도 힘을 보탠다. 최근 ‘승리호’가 넷플릭스의 ‘글로벌 많이 본 콘텐츠’ 1위에 오르고, 영화 ‘살아있다’와 드라마 ‘스위트홈’ 등이 주목 받았다. 미국의 OTT인 애플TV플러스는 윤여정·이민호 등이 주연하는 드라마 ‘파친코’와 김지운 감독이 연출하고 이선균 등이 출연하는 드라마 ‘미스터 로빈’ 등을 제작 중이다. ‘사랑의 불시착’으로 OTT의 힘을 과시한 손예진 역시 할리우드 영화 ‘크로스’ 출연을 대기 중이다.

이처럼 한국배우들은 이제 할리우드의 중심에 서 있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그만큼 전 세계에 통하는 콘텐츠의 주역으로서 당당함을 안고 있다. ‘미나리’로 주목받고 있는 윤여정은 자신을 할리우드 스타 메릴 스트립에 비유하자 이렇게 말했다.

“비교되는 것에는 감사하다. 하지만 나는 한국사람이다. 내 이름은 윤여정이다. 나는 그저 나 자신이고 싶다.”

윤여수 기자 tadad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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