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토리 사커] 한일전은 ‘영웅 아니면 역적’…벤투의 운명은?

입력 2021-03-25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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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국스포츠 최고의 흥행카드는 일본전이다. 종목은 불문이다. 아픈 역사가 맞물리면서 어떤 경기를 하든지 초미의 관심사다. 특히 축구는 전쟁이다. 1954년 스위스월드컵 아시아 예선을 앞두고 “일본을 이기지 못하면 현해탄에 몸을 던지겠다”며 결기를 드러낸 게 바로 한국축구다.

해방 이후 일본축구가 한국을 찾은 건 1960년 11월 효창운동장에서 열린 칠레월드컵 예선전이 처음이다. 팽배한 반일 감정으로 월드컵이나 올림픽 예선이 아니면 쉽게 발을 들이지 못했던 시절이다.

그러다가 양 국이 처음 뜻을 함께 한 건 1972년이다. 가까이 하기엔 너무 먼 나라이지만 ‘아시아축구의 성장’이라는 대의를 위해 서로의 도움이 필요했다. 그래서 탄생한 게 ‘한일 정기전’이다. 축구대표팀의 전력을 점검하는 차원에서 매년 친선경기를 열기로 했고, 지금까지도 그 명맥이 유지되고 있다.

하지만 말이 친선이지 경기는 살벌했다. 국가의 자존심이 걸린 승부 앞에서 감독은 운명을 걸었다. 그라운드의 선수는 죽을힘을 다해 뛰었다. 관중은 핏발을 세웠다. 그렇게 한일전은 매번 불타올랐다. ‘이기면 영웅, 지면 역적’이라는 말이 괜히 나온 게 아니다.

역대 한국축구 최고스타로 꼽히는 차범근은 일본전에 특히 강했다. 1972년 정기전부터 1978년 방콕아시안게임까지 총 14번 일본전에 출전해 10승 4무로 단 한 번도 지지 않았다. 또 한 차례 해트트릭 포함 6골을 넣어 가장 많은 골을 기록했다. 평소 차범근은 “우리의 역사적인 상황 때문에 한일전 결과는 언제나 커다란 파장을 일으켰다. 민족의 아픔을 가중시킬 수 있었기 때문에 한일전은 특별히 전략이 필요한 게 아니고 정신무장이 강조되는 경기였다”며 의미를 부여했다.

일본전하면 황선홍도 빼놓을 수 없다. 4경기에서 5골을 넣을 정도로 강했다. A매치 데뷔전이던 1988년 아시안컵(2-0 승)을 시작으로 1990년 다이너스티컵(2-0 승), 1994년 히로시마 아시안게임(3-2 승), 1998년 친선경기(2-1 승) 등에서 골을 넣었는데, 그게 모두 결승골이다.

일본전 최다 출전은 박성화다. 그는 1975년 메르데카컵부터 19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까지 총 16번 일본을 상대했다. 평소 수비수로 뛰다가 1979년 동대문운동장에서 열린 정기전에선 최전방 공격수로 깜짝 변신해 3골을 터뜨리며 4-1 승리의 주역이 되기도 했다. 양 국 통틀어 한일전 해트트릭은 차범근과 박성화, 둘 뿐이다.

파울루 벤투 감독이 이끄는 한국대표팀이 25일 오후 7시 20분 요코하마 닛산 스타디움에서 일본과 80번째 ‘숙명의 라이벌전’을 갖는다. 현재까지 한국은 상대전적에서 42승 23무 14패로 앞서 있다.

일본전을 앞두고 많은 논란이 일었다. 신종 코로나바이러스 감염증(코로나19)이 확산되는 상황에서 일본 원정을 비판하는 국민 청원이 등장하는가 하면, 한국축구가 도쿄올림픽 개최를 위한 대외 홍보용이라는 평가도 나왔다.


대표 선발 과정도 매끄럽지 못했다. 특히 K리그 구단과의 소통이 제대로 이뤄지지 않았다는 지적이 잇따랐다. 게다가 손흥민(토트넘), 황의조(보르도), 황희찬(라이프치히) 등 주요 선수가 빠져 사실상 ‘2군’ 취급을 받는 실정이다. 그런 탓인지 한일전하면 언제나 긴장과 흥분, 떨림이 앞섰지만 이번에는 조금은 다른 느낌으로 다가온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본전 결과는 중요하다. 가장 최근의 친선경기는 2011년 8월 10일 일본 홋카이도 삿포로돔에서 열렸는데, 한국은 0-3으로 졌다. 어떤 경우든 크게 지면 ‘참사’ ‘충격’ ‘악몽’ ‘치욕’ 등 지울 수 없는 상처만 남을 뿐이다.

이왕 치르는 경기라면 무조건 이겨야한다. 베스트 멤버가 빠졌다는 핑계는 용납될 수 없다. 모든 책임은 감독이 져야한다. 외국인 감독 입장에선 단순한 한 경기일지 몰라도 우리 국민들에겐 남다른 의미의 한일전이다.

최현길 기자 choihg2@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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