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 인터뷰] ‘인간 새’ 김종일의 컴백, “고국에 진 빚, 후배 육성으로 갚을 터”

입력 2021-04-02 06: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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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시안게임 멀리뛰기 2연패의 주역 김종일이 31년 간의 미국 생활을 마치고 최근 영구 귀국했다. 미국에서 박사 학위를 받고 현지 대학에서 교수 겸 육상감독으로 활약한 그는 그간의 많은 경험을 바탕으로 후배들에게 육상 이론과 실제를 전수하려 한다. 사진제공 | 김종일

“칼 루이스를 키워냈던 탐 텔레즈를 비롯한 세계적 지도자들에게 배운 이론과 기술, 미국 대학육상선수들을 가르치면서 습득한 현장 경험을 최대한 살려 우리 육상의 발전에 기여하도록 노력하겠습니다.”

아시안게임 육상 남자 멀리뛰기 2연패의 주역 ‘인간 새’ 김종일(59)이 돌아왔다. 미국 미시건주 캘빈대학교 명예교수인 그는 1982년 뉴델리 아시안게임과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 멀리뛰기에서 모두 7m94를 뛰어 연속 우승한 바 있다.

김종일은 1988년 서울올림픽을 끝으로 현역에서 은퇴한 뒤 이듬해 1월 글로벌 스포츠 브랜드 나이키의 도움으로 유학길에 올랐다. 워싱턴주립대에서 6개월간 영어교육 프로그램을 소화한 뒤 외국인 영어능력평가시험(GRE)을 통과했다. 이어 그해 9월 학기에 이 대학 체육대학 석사과정(체육행정)에 입학해 1993년 이수했고, 바로 박사과정(교육행정)에 도전해 1996년 학위를 취득했다. 1997년 미시건주 그랜드래피즈에 있는 캘빈대 교수 겸 육상 감독으로 채용돼 2020년까지 23년간 활동한 그는 31년 만에 영구 귀국했다. 정년이 없는 보장된 미래를 마다한 채 지난해 11월 한국으로 돌아온 김종일을 최근 만났다.


-안락한 삶 대신 귀국을 택한 배경이 궁금하다.

“나의 오늘을 있게 한 고국을 위해 그간 쌓은 경험을 우리 후배들에게 전수하고 싶었다. 지금 살고 있는 성남 분당의 아파트를 86년 아시안게임 우승 포상금으로 마련했다. 미국 유학비도 주변의 지원을 받았다. 국가로부터 참 많은 혜택을 받았다.”

김종일은 초등학교 3학년 때인 1972년 육상에 입문했고, 이듬해 소년체전 높이뛰기 초등부 준우승을 차지했다. 진천중 시절인 1978년 소년체전에선 높이뛰기(1m94), 멀리뛰기(6m80) 남중부 신기록으로 우승했다. 청주고 1학년이던 1979년에는 멀리뛰기 남고부 신기록(7m20)을 수립했다. 두루 성과를 낸 그가 멀리뛰기에 집중하게 된 계기는 “178㎝의 체격에선 멀리뛰기가 유망하다”는 지도교사의 권유를 받아들였기 때문이다.


-국가대표 시절이 참 화려했다.

“청주고를 다니던 1980년 처음 국가대표가 됐다. 1958년 도쿄아시안게임 멀리뛰기 우승자인 서영주 선생님의 지도를 받으며 기량이 일취월장했다. 1981년 멕시코 청소년육상대회에서 7m98을 뛰어 한국기록(현재 한국기록은 김덕현의 8m22)을 작성했다. 1982년 서말구(남자 100m 한국기록 보유자) 선배의 권유로 동아대에 진학했는데, 그해 11월 뉴델리 아시안게임에선 7m94로 한국육상 첫 금메달을 땄고 1986년 서울아시안게임에서도 같은 기록으로 대회 2연패에 성공했다. 잠실올림픽주경기장을 가득 메운 관중의 응원은 지금도 생생히 기억난다.”

올림픽과 인연은 없었다. 김종일은 1984년 LA올림픽 결선에 올랐으나 8위(7m86)에 그쳤고, 1988년 서울올림픽에선 허벅지 부상으로 결선 진출에 실패했다. 세계의 높은 벽을 실감한 그는 미국의 선진육상이론과 기술을 배워야겠다는 결론을 얻었고, 나이키의 주선으로 1989년 1월 워싱턴주립대에서 힘들고 고된 유학생활에 들어갔다. 석·박사과정을 이수하며 체육대학 조교로 일해 학비 면제와 함께 월 1000달러의 급여를 받아 생활했다.


-박사학위 취득 후 캘빈대에 둥지를 틀었는데 특별한 인연이라도 있었나?

“가장 먼저 취업 의뢰에 회신을 해준 곳이 캘빈대다. 올림픽에 2회 참가한 점을 높이 평가해줬다. 캘빈대는 60~70명 규모의 육상팀을 운영해 매년 전미 대학 3부리그에 참여하고 있다. 2010년까지 13년간 육상팀을 지도했는데, 전국대회에서 4차례 준우승을 했다. 또 4차례 ‘올해의 지도자상’을 받았다.”

미국은 세계적 육상강국이다. 2016년 리우데자네이루올림픽에선 32개의 메달(금 13·은 10·동 9)을 땄고, 2019년 도하 세계선수권대회에선 29개의 메달(금 14·은 11·동 4)을 획득했다. 이런 미국육상의 저력은 대학에서부터 나왔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미국의 멀리뛰기 수준은 어느 정도인가?

“1901년부터 지난해까지 18차례 세계기록이 나왔는데 그 중 미국이 13차례 이름을 올렸다. 현재 세계기록도 1991년 마이크 포웰의 기록(8m95)으로 30년째 깨지지 않고 있다. 더 유명한 선수는 칼 루이스로 휴스턴대 재학 시절인 1984년 LA올림픽부터 1988년 서울, 1992년 바르셀로나, 1996년 애틀랜타올림픽 남자 멀리뛰기를 4연패했다.”


-명성 높은 지도자들과 여러 인연을 맺었는데.

“칼 루이스를 15년간 지도한 탐 텔레즈 선생이다. LA올림픽과 서울아시안게임을 준비할 때 나도 그 분의 가르침을 받았다. 도움닫기를 위한 스피드 강화, 발구름 직전의 네 발자국 중요성을 강조하셨다. 1982년 뉴델리아시안게임을 앞두고는 LA의 USC에서 켄 마쓰다 선생의 가르침도 받았다. 또 구소련 세단뛰기 선수였던 빅터 사니에프(1968년부터 올림픽 3연패) 선생과 1991년부터 세계선수권대회 10종 경기 3연패를 거둔 미국의 댄 오브라이언을 지도한 릭 슬론 선생 등에게 도약의 이론과 실제를 배웠다.”


-향후 국내에서 계획은?

“우선 국내환경에 적응해야 할 것 같다. 미국과 한국의 육상 여건이 많은 차이가 있는 건 사실이다. 주위상황을 고려해야 한다. 대한육상경기연맹의 연간 예산은 15억 원인데, 미국은 400억 원이 넘는다. 각급 학교와 훈련 시스템도 상이하다. 어린 선수들에게 과하지 않은 훈련을 적용하면서도 최대치 효과를 얻는 방법을 강구하겠다.”

남장현 기자 yoshike3@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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