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니콜라이 카푸스틴 1주기 맞아 손열음이 연주
- 재즈인 듯 재즈 아닌 음악, 고난도 기교의 집합체
- 귀는 시원하고 가슴은 뜨거워지는 ‘유쾌한 추격전’
피아니스트 손열음의 팬이라면 그가 연주하는 카푸스틴의 에튀드 작품들을 무대 혹은 인터넷 영상을 통해 접해봤을지 모르겠다.- 재즈인 듯 재즈 아닌 음악, 고난도 기교의 집합체
- 귀는 시원하고 가슴은 뜨거워지는 ‘유쾌한 추격전’
손열음이 아니었다면 우리에게 여전히 생소했을 가능성이 높은 작곡가, 니콜라이 카푸스틴은 1937년에 태어나 2020년 7월 세상을 떠난 우크라이나의 작곡가이자 피아니스트다.
사진을 보면 젊은 시절 영화배우를 해도 되었을 것 같은 미남의 노신사인데 단정하게 자른 흰색 머리와 수염이 썩 잘 어울리는 데다 1980년대 풍의 커다란 안경 너머로 보이는 두 눈이 큼직하고 깊다.
카푸스틴은 모스크바 음악원에서 정통 클래식을 공부했지만 졸업 후 무려 11년간이나 재즈 오케스트라에서 연주활동을 한 경력을 갖고 있다. 그래서 그가 작곡한 작품들에서는 재즈의 색채가 강렬하게 묻어있다.
하지만 정작 카푸스틴은 자신의 작품들이 재즈와 엮이는 것을 썩 좋아하지 않았던 것 같다. 스스로 “나는 재즈 음악가가 아니며, 재즈 피아니스트가 되려고 한 적도 없다”고 밝힌 일도 있다. 재즈의 가장 중요한 요소인 즉흥연주(improvisation)에 대해서는 아예 “관심이 없다”고 단언했을 정도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여전히 사람들은 그의 작품에서 재즈의 색깔을 발견하고, 재즈의 향기에 코를 대고, 재즈의 질감에 손을 문댄다. 저 세상 어딘가에서 카푸스틴이 피아노 건반을 두드려대며 버럭 버럭 화를 내더라도 어쩔 수 없는 일이다.
“7월에 나온다”던 약속대로 손열음이 오닉스 레이블을 통해 카푸스틴의 피아노 작품집 음반을 냈다. 7월은 카푸스틴의 1주기. 이 음반은 그에 대한 추모의 의미가 담겨 있다.
총 15개의 트랙으로 구성되어 있으며 카푸스틴의 작품 중 가장 많이 알려져 있는 ‘8개의 콘서트 에튀드 Op. 40’이 전반부를 차지한다. 후반은 4악장으로 된 피아노 소나타 2번 Op. 54이며 그 사이에 Variations Op. 41, Moon Rainbow Op. 161, Sonatina Op. 100이 삽입되어 있다.
알 만한 사람은 다 알고 있겠지만, 손열음은 재즈에도 상당한 관심과 조예를 갖고 있는 클래식 피아니스트다. 무대에서 재즈 스타일로 편곡된 터키행진곡 같은 곡을 앙코르 연주하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었다. 실제로 그에게는 재즈를 본격적으로 연구한 시기도 있었다.
하지만 손열음이 재즈를 클래식의 상위 또는 동등 개념의 대상으로 다루었다고 보기는 어렵다. 아마도 손열음은 클래식에 대한 오래된 질문들을 클래식의 밖으로 걸어 나가 재즈에게 던져보고 싶었던 것이 아닐까. 그러고 보면 많은 클래식의 거장들이 클래식과 재즈의 경계를 오가며 자신의 독특한 음악세계를 구축하곤 했다.
그런 점에서 손열음의 재즈에 대한 접근은 카푸스틴의 그것과 통하는 지점이 분명 존재한다.
음반 속 카푸스틴의 작품은 피아니스트와 작곡을 겸하는 인물들의 피아노 작품들이 대부분 그러하듯 고난도의 테크닉을 요구하고 있다. 숨도 쉬지 않고 줄기차게 내달리는 오른손과 변칙적인 리듬을 지지하는 왼손이 필요하다.
이 음악들에게 부제를 붙여줄 수 있다면, 그것은 ‘유쾌한 추격전’쯤 될 것이다.
손열음 연주의 핵심은 명쾌함이다. 한 마디로 의구심이 들지 않는 연주다. 시원할 정도로 단호하다. 단지 건반을 세게 두드린다고 이런 시원함이 얻어지는 것은 아닐 것이다.
손열음의 카푸스틴 연주를 듣고 있으면 눈앞에 선명한 이미지가 떠오른다.
그것은 패크맨 게임과 같은 거대한 2차원 미로다. 미로의 중앙에 멋진 수트를 입은 남자와 파티복 차림의 여자가 있다. 그리고 한쪽에서는 검은 양복을 입은 갱단이 이들을 쫓는다. 두 손에 땀을 쥐게 하는 긴박한 추격전이 이어진다. 이 모든 화면은 흑백이며, 마치 그래픽노블 느와르의 한 장면처럼 보인다.
쫓고 쫓기는 스릴로 가득한 8개의 에튀드를 손열음은 시원시원하게 쳐나간다. 이럴 때의 손열음은 야구선수로 치면 투수, 그 중에서도 150km 후반대의 패스트볼을 던지는 파이어볼러다. 포수의 미트를 향해 일직선으로 날아가 꽂히는 강속구는 자체로 예술이다.
에튀드에서도 카푸스틴 특유의 재즈적 분위기는 곳곳에서 발견된다. 5번 ‘Raillary’에서의 왼손을 들어보시라. 7번 ‘인터메조’의 뻑뻑한 리듬구성에서는 재즈계의 기인 델로니어스 몽크의 냄새마저 살짝 풍긴다.
카푸스틴의 작품은 매우 재즈적이면서 또한 재즈적이지 않다. 작곡자가 굳이 자신의 작품에서 ‘재즈’를 지우고자 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지 모른다.
엇박자가 만들어내는 다채로운 리듬, 컴핑 스타일의 왼손 무빙, 단음의 연타가 만들어내는 분위기는 확실히 재즈적이다. 반면 이 음반을 들어보면 카푸스틴이 작곡을 할 때 음표들에 ‘재즈를 바르는’ 특유의 코드를 그다지 선호하지 않았음을 발견할 수 있다.
그리고 무엇보다, 그의 작품들은 마음껏 스윙하지 않는다.
물론 재즈 특유의 스윙감이 아주 없는 것은 아니고, 소나타 2번의 2악장 같은 곳에서는 확실히 중간에 스윙하고 있지만.
이 음반은 표지도 상당히 근사하다.
붉은 기가 도는 낡아 보이는 업라이트 피아노를 등지고 앉은 손열음이 보인다. 흰색 드레스를 입고 아슬아슬한 힐을 신은 손열음은 손에 든 책을 읽고 있다. 시각적으로는 화이트(왼쪽·손열음)와 레드(오른쪽·피아노)가 대비되어 있는데, 이는 하단의 ‘YEOL EUM SON’과 ‘KAPUSTIN’과도 매칭된다.
이 강렬한 대비는 중간 경계지점에서 묘한 타협을 보고 있다. ‘붉은 색’ 피아노 의자에 앉아 있는 손열음의 긴 머리카락은 ‘붉게’ 염색되어 있는 것이다.
갱단의 추격을 피해 숨 가쁘게 미로 속을 도망치던 여인이 탈출에 성공해 돌아와 있는 것일까.
이 음반의 마지막은 피아노 소나타 2번의 4악장. 앞서 14개의 트랙이 보여준 고도의 테크닉이 총출연하는, 과연 무대의 마침표다운 화려한 피날레다. 3분 40초라는 시간의 금속 캔 안에 손열음이 가진 기교의 최대치를 꾹꾹 눌러 담은 뒤 봉인해놓았다. 귀는 시원한데, 가슴은 막 뜨거워진다.
곡이 끝나자 나도 모르게 그만 “짝짝짝” 박수를 쳐버리고 말았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 이 코너는 최근 출시된 음반, 앨범을 소개하는 코너입니다. 코너의 타이틀 ‘나명반’은 ‘나중에 명반이 될 음반’이라는 의미를 갖고 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