피아노를 위한 시승기 같았던 박재홍의 ‘함머클라비어’ [예체능 양기자]

입력 2022-04-04 16:44: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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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로그램을 보고 흥분한 것은 오랜만이다.
부조니 콩쿠르 우승자 박재홍의 피아노 리사이틀.
2부를 베토벤의 피아노 소나타 29번 한 곡으로 채웠다.
4월 1일 서울 서초동 예술의전당 IBK챔버홀에서 열린 이날 공연의 정식 타이틀은 2022 스타인웨이 위너콘서트 in 코리아 박재홍 피아노 리사이틀이었다.

베토벤 피아노 소나타 29번은 일명 ‘오함마 소나타’로 불리는 ‘함머클라비어’.
함머클라비어의 의미는 별 다를 게 없다.
피아노의 풀네임인 ‘피아노 포르테’를 독일어로 옮겨놓은 것뿐이다.
사실 소나타 작품에 ‘함머클라비어’라는 단어를 붙인 것은 베토벤만이 아니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베토벤의 ‘함머클라비어’가 타 소나타(심지어 베토벤의 다른 소나타와 비교해서도)와 구별되는 점은 거대하게 확장된 스케일과 함께 피아니스트로 하여금 거의 50분에 달하는 연주를 요구하고 있다는 것.

베토벤은 생전 “이 작품이 제대로 연주되려면 50년은 지나야 할 것”이라 호언했다고 하는데, 다행히(?) 클래식음악 사상 최강의 피아니스트 프란츠 리스트가 15년 만에 연주해 베토벤의 예언 성취를 35년 단축시킬 수 있었다.

개인적으로 이 곡의 연주는 피아노의 시승기같다는 생각이다.
자동차 제조사들은 새로운 차량 모델이 출시되면 기자, 전문가들에게 시승의 기회를 제공하는데 성능이 우수한 차량의 경우 경주용 서킷에 올려놓고 제로백(100km까지 다다르기까지 걸리는 시간), 최고속도, 극한의 코너링 등 차량 성능을 극한까지 테스트하게 된다.


그런 점에서 함머클라비어 소나타는 피아노를 서킷에서 연주하는 것과 같다.
아마도 베토벤은 이 소나타를 통해 당대 최고의 피아노가 가진 표현력과 성능을 극한에 이르도록 끌어내보고자 했던 것은 아니었을까.

피아니스트가 내보일 수 있는 기교의 끝을 보여주는 소나타.
피아니스트로 하여금 평생 갈고 닦은 예술적 성취의 밑바닥까지 드러내도록 강요하는 소나타.
이것이 베토벤의 함머클라비어다.

하지만 아는 사람들은 안다.
이 무자비한 소나타의 연주의 어려움은 고난이도의 기량이 아닌, 3악장의 지극히 느린 아디지오라는 것을.
20세기의 명피아니스트 빌헬름 켐프는 이 악장을 두고 “베토벤이 작곡한 가장 장대한 모놀로그”라고 표현했는데, 사실이 그러하다.

조금만 삐끗해도 ‘세상에서 가장 지루한 모놀로그’로 빠져버릴 수 있는 이 3악장에 숱한 피아노의 명장들이 도전장을 던졌다.

누군가는 고독하게, 누군가는 가득 찬 비애를 연주했다.
회한을 연주한 사람이 있는가 하면, 이 악장을 기도로 표현한 피아니스트도 있었다.

그런 점에서 박재홍의 해석은 신선하고 각별했다.
스물 셋 청년이 그린 3악장의 아다지오 소스테누토는 마치 카메라가 멀리서 잡은 익스트림 롱샷의 풍경처럼 아름다웠다.
때때로 고독하고, 슬프고, 후회가 밀려들지만 종내는 희망의 빛이 드리우는 멋진 연주.

무엇보다 박재홍이 이 악장을 한 세대 전의 거장들처럼 연주하지 않아 좋았다.
겉늙지 않은 젊은 해석, 젊은 연주.
선배 거장들이 깨달은 바를 20대 초반의 박재홍의 손등 위에 올려놓는 것은 무리이다.
그런 점에서 박재홍이 연주하는 함머클라비어를 10년 뒤, 20년 뒤에도 듣고 싶다.
그것은 글렌 굴드의 파격적이고 충격적이었던 1955년 골든베르크 변주곡 음반과 죽기 1년 전에 녹음한 1981년 음반을 비교해 듣는 것만큼이나 유쾌한 즐거움을 선사할 것 같다.

1부에서는 슈만의 ‘아라베스크 C장조’와 ‘피아노 소나타 1번, 대소나타’를 연주했다.
슈만의 극단적 두 자아인 플로레스탄과 오이제비우스의 악상이 교대로 등장하는 4악장이 백미.

박재홍은 큰 체구로 찍어 누르는 육중한 타건이 일으키는 폭발음과 새벽에 눈이 내리는 소리까지 화가의 팔레트 위 물감처럼 다채로운 볼륨과 음색을 모두 갖춘 연주자이다.
분명한 것은 확실하게 구분되는 몇 가지 ‘자신만의 소리’를 갖고 있다는 것인데, 그는 이 소리를 갖고 어떤 곡이든 맛있게 연주해낸다.
30분쯤 그의 연주를 듣고 있으면 어느 틈에 그의 음색에 중독이 되어 버리니, 무서운 일이다.


연주 중간중간 포즈 때마다 머리를 들어 허공을 향하는 그의 모습은 이제 그만의 대표 퍼포먼스가 되어버린 느낌이다.
함머클라비어를 연주하고 나서는 스물 셋의 청년도 머리카락이 땀에 흠뻑 젖었고, 다소 지쳐보였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관객들은 몇 번이나 무대 위로 연주자를 불러 나오게 했고, 그는 세 곡의 앙코르를 선물했다.
앙코르에서는 살짝 지친 소리가 났는데, 그건 그것대로 좋았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제공 | WC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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