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아한 슬픔의 박효신, 신비로웠던 신영숙…뮤지컬 웃는남자 [공연리뷰]

입력 2022-07-06 11:2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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웃으면 복이 온다고 하였다.
복이 와서 웃는 게 아니라, 웃어야 복이 온다는 유명한 코미디언의 말도 있다.

여기, 한 남자가 있다.
그는 늘 웃고 있다. 단 한 번도 웃는 일을 멈춰본 적이 없다.
즐거울 때, 행복할 때는 물론 슬프고 아플 때, 심지어 창자가 쏟아져 나올 만큼 비통에 잠길 때조차 그는 웃었다.

그래서 그는 웃는 남자이다.

하지만 그의 인생은 그의 얼굴처럼 웃지 않았다.
그는 웃었지만 속은 울고 있었다.
이 이야기, 뮤지컬 ‘웃는 남자’는 납덩이처럼 무거운 질문을 관객에게 던진다.

신은 왜 이 남자에게 웃는 얼굴을 주었음에도, 웃는 인생은 허락하지 않았던 것일까.

박효신의 ‘그윈플렌’은 정평이 나 있다. 2018년 뮤지컬 ‘웃는남자’의 초연에서 그윈플렌을 연기했던 박효신은 4년 만에 다시 입가에 붉은 선을 그었다.



박효신의 그윈플렌을 보고 있으면, 이제 그는 더 이상 노래로만 승부하는 배우가 아님을 실감하게 된다. 우아한 움직임, 응축된 안개와 같은 음색, 텍스트가 의식되지 않는 대사의 전달. 격정적인 솔로는 물론 듀엣에서도 박효신의 ‘소리’는 대단히 극적인 울림을 들려준다.

민영기(우르수스 역)와의 이중창이 만들어낸 근육질의 대립은 듣는 이의 심장으로 하여금 100미터 전력질주를 하도록 만들었다.

여기에 신영숙의 ‘조시아나’는 신비로울 정도.
조시아나 공작부인은 이 작품에서 아마도 가장 복잡한 캐릭터일 것이다. 극의 흐름에 따라 조시아나는 세 개의 다른 얼굴을 보여준다.

첫 번째는 등장에서부터 그윈플렌을 유혹하는 장면까지의 조시아나, 두 번째는 그윈플렌의 진짜 신분을 알게 된 뒤 매몰차게 돌아서는 조시아나, 마지막으로 그윈플렌으로부터 진정한 용기와 인간적 매력을 발견하고 ‘각성’하는 조시아나.

조시아나를 연기하는 일은 어지간한 베테랑 배우들에게도 쉽지 않을 것이다. 이 세 가지 모습 중 어느 하나에 조금이라도 무게가 더 실리는 순간 균형이 무너질 수 있기 때문이다.

게다가 조시아나를 단순하게 표현하는 것(예를 들어 팜파탈의 한정)은 뮤지컬 아이다의 ‘암네리스 공주’를 속물에서 현인으로의 변화로 해석하는 것처럼 밋밋한 직선이 되어 버린다.

신영숙은 반어적인 귀여움과 뇌쇄적인 매력의 소유자, 인간의 진정한 아름다움을 발견하는 지혜와 이성을 지닌 조시아나라는 이중적인 인물을 완벽하게 드러냈다.


신영숙의 조시아나는 삶이 묻힌 그윈플렌의 검은 때 속의 순수함과 함께 그윈플렌 자신조차 발견하지 못했던, 웃는 얼굴의 피부 안에 감추어진 진짜 웃음을 찾아낸다.

박효신의 그윈플렌과 신영숙의 조시아나 조합은 ‘사랑’에 대한 질문 하나를 힘겹게 건져 올린다. 이 사랑은 두 가지 속성을 갖고 있는데, 하나는 대상을 아는 사랑이고 다른 하나는 모르는 사랑이다.

사랑이 예술과 다른 점은 좀처럼 ‘아는 만큼 보이지’ 않는다는 것이다. 오히려 모르기에, 조금밖에 알지 못하기에 사랑은 불길처럼 크게 타오르곤 한다. 하지만 그 사랑은 빠르게 연소되고, 소멸의 길로 들어간다.

조시아나의 그윈플렌에 대한 사랑은 ‘조금밖에 알지 못하는 사랑’이었고, 급히 사그라지고 만다.

그렇다면 그윈플렌의 사랑은 어떨까.
그윈플렌과 눈이 보이지 않는 ‘데아’의 사랑은 앞에서 드러난 두 가지 사랑의 속성을 벗어난 사랑이다. 그것은 대상을 ‘너무나 잘 알고 있는’ 사랑이다. 가장 완성하기 어려우면서, 가장 완벽에 가깝게 구현될 수 있는 사랑의 유형이다.

그윈플렌에게 이 ‘완벽에 가까운 사랑’의 대상이 더 이상 존재하지 않는 삶이 주어진다. 더 이상 볼 수도, 들을 수도, 만질 수도 없는 사랑. 비극으로 가득했던 그의 인생 앞에 더 캄캄하고 참담한 비극이 던져졌다.

그윈플렌과 데아의 마지막을 누가 감히 쉽게 단정할 수 있을까.
박효신의 마지막 절규는 참으로 ‘반어적으로 아름다운’ 절창이었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제공 | EMK뮤지컬컴퍼니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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