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랑한다면 네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걸 해줘” [양형모의 일일공 프로젝트]

입력 2023-01-25 11:4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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유대인의 지혜서 탈무드에 나오는 에피소드입니다.
한 로마인이 랍비를 찾아가 이렇게 요구합니다.
“내가 한 발로 서 있는 동안 탈무드의 핵심 내용을 설명해 보시오.”
랍비는 “평생 연구를 해도 깨닫기 어려운 탈무드의 지혜를 어찌 그 짧은 시간 안에 설명하란 말인가”하며 단박에 거절했습니다. 뜨거운 모욕감마저 느꼈을 것입니다.

로마인은 또 다른 랍비를 찾아갑니다. 랍비의 이름은 힐렐이었습니다. 힐렐은 탈무드에 등장하는 위대한 랍비 중의 한 명입니다.
로마인의 요청에 힐렐은 조금도 뜸을 들이지 않고 이렇게 알려주었습니다.
“당신이 싫은 일을 다른 사람보고 하라고 하지 마시오.”

유대교뿐만 아니라 기독교, 불교 등 많은 종교들이 같은 말을 하고 있습니다. 기독교의 ‘네 이웃을 사랑하라’ 또한 결국은 “네가 싫은 일을 이웃에게 강요하지 말고, 네게 좋은 일을 이웃에게 베풀어라”일 것입니다.

뮤지컬 ‘루드윅 : 베토벤 더 피아노’를 보며 탈무드의 에피소드가 떠올랐습니다.
루드윅(베토벤)은 아들을 ‘제2의 모차르트’로 만들려는 아버지(심지어 알코올 중독자입니다)의 강압적인 교육을 받으며 자랐습니다. “당신의 방에서 흘러나오는 아름다운 피아노 소리에 나는 꿈을 갖게 되었다”라는 마리의 말에 루드윅은 “당신이 들었다는 그 피아노 소리는 그저 아버지에게 매를 맞지 않기 위해 연주했던 것일 뿐”이라고 했습니다.

그렇다면 루드윅의 아버지는 어린 베토벤을 사랑하지 않았던 것일까요. 아들의 나이까지 속여 가며 ‘제2의 모차르트’로 만들고자 했던 것이 아버지의 성공 욕심 때문만은 아니었을 겁니다. 아들에 대한 아버지의 사랑도 틀림없이 있었겠지요. 물론 그 사랑은 처음부터 잘못 되어 있었지만요.


나이가 든 루드윅은 조카 카를에게 피아노와 작곡을 가르칩니다. 친어머니와의 관계를 단절시킨 채 루드윅은 카를이 장성할 때까지 포기하지 않고 음악을 지도합니다. 그런데 그의 목적이 낯익습니다. 카를을 ‘제2의 베토벤’으로 만들어주겠다는 거였으니까요.

결과는 참담했습니다. 사랑의 가면을 쓴 루드윅의 강압적인 교육은 카를을 한계까지 밀어붙였고, 결국 그는 루드윅이 갖고 있던 권총으로 자살을 시도합니다. 이 사건으로 루드윅과 카를의 관계는 비극적으로 끝이 나버립니다. 파국이었습니다.

이 작품은 어린 시절의 베토벤, 청년 베토벤, 노년의 베토벤을 ‘차례로’가 아닌, ‘동시에’ 무대에 등장시킵니다. 덕분에 관객은 베토벤이라는 천재 음악가의 그늘진 삶과 내면을 잘 편집된 파노라마를 보듯 감상할 수 있습니다.

죽음을 앞둔 루드윅은 오랜 벗인 마리에게 장문의 편지를 씁니다. 이 작품은 수녀가 된 마리가 편지를 뜯어 읽는 것으로 시작하고, 마무리를 합니다.
루드윅은 죽을 때가 되어서야 자신의 위대한 음악으로도 구원할 수 없었던 영혼의 안식과 깨달음을 얻습니다. 그리고 긴 후회를 합니다. 그토록 증오했던 아버지의 행동을 자신이 카를에게 고스란히 돌려주었음을 돌아봅니다. 자신이 가장 싫어했던 일을 타인에게, 그것도 가장 사랑하는 대상에게 강요했던 것입니다. 그것은 ‘사랑’이 아니라, ‘사육’이었음을 고백합니다.

뮤지컬 ‘루드윅 : 베토벤 더 피아노’는 추정화 작가와 허수현 작곡가의 작품입니다. 저는 이 두 사람을 ‘한국 뮤지컬 최고의 명콤비’라고 생각하고 있습니다. ‘은밀하게 위대하게’, ‘프리다’, ‘달을 품은 슈퍼맨’, ‘블루레인’, ‘인터뷰’, ‘오션스’ 등 두 사람이 의기투합해 만든 작품은 무척 많습니다.


추정화-허수현 콤비의 스타일을 ‘한 발로 서 있는 동안’ 설명하기는 힘들 것입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개인적인 생각을 간략하게 표현해 보자면 다소 기괴하고, 그로테스크한 분위기, 인간의 어둡고 감추고 싶은 속살을 밖으로 끄집어내는 데에 그치지 않고 이를 분노, 후회, 고통과 함께 일시에 폭발시켜 버리는 힘을 다수의 추-허 콤비 작품에서 볼 수 있습니다. 이 ‘힘’의 발견자들은 고스란히 추정화-허수현 콤비의 팬이 되어버리고 맙니다.
기회가 된다면 꼭 추정화 작가, 허수현 연출을 만나 그간 궁금했던 점들을 물어보고 싶군요.

뮤지컬 ‘루드윅 : 베토벤 더 피아노’는 2018년에 초연되었습니다. 이후 2019년, 2020년에 이어 2022년 연말에 개막해 현재 사연 째입니다.

루드윅 역의 김주호 배우의 열연은 베토벤의 음악만큼이나 감동적이었습니다. 그야말로 ‘피를 토하는 열연’이라는 걸 오랜 만에 무대에서 경험할 수 있었습니다. “오늘 난 이 무대에서 죽어도 좋다”라는 결의가 느껴지는 연기였습니다.

뛰어난 비주얼부터 눈길을 잡은 임세준의 연기도 신선했습니다. 청년 베토벤과 카를을 연기했는데 둘 다 좋았지만 그 중에서도 루드윅의 어긋난 사랑을 증오하고 호소하고 결국 극단적 시도로 나아가는 카를은 공감의 힘이 셌습니다.

이은율의 마리는 삼연에 이어 두 번째 시즌. 특유의 맑고 투명한 음색은 마리의 넘버를 눈을 감고 감상하게 만드는 매력이 있습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나긋하고 부드럽지만 김주호의 무지막지한 에너지에 맞서 조금도 밀리지 않습니다. 카리스마 강한 독재적 지휘자 앞에서도 미소를 잃지 않으며 할 연주 다 하는 피아니스트 협연자 같습니다.


루드윅은 이 작품의 중심이자 장면 전환의 키를 쥔 PD입니다. 그는 노년의 베토벤이었다가 순식간에 어린 시절 베토벤의 아버지가 되기도 하고, 청년 베토벤이 등장하면 슬쩍 무대의 해설자로 물러서기도 합니다.
당차고 도발적이지만 유머와 예의를 갖춘 마리는 루드윅이 나아갈 방향을 등장할 때마다 알려주는 역할을 합니다. 마리 덕에 이 극은 엔딩을 향해 나아가는 발걸음이 한층 수월해졌습니다.

“사랑은 내가 아니라, 그가 원하는 것을 해주는 것”이라고 합니다.
시점을 살짝 바꿔 보자면 “사랑한다면 네가 아니라, 내가 원하는 것을 해줘”일 것입니다.
사실 이 말만 지키고 살아도 이 세상 커플의 90%는 다툴 일도, 깨질 일도 없을 것 같지 않습니까.

잘 모르겠다면, 뮤지컬 ‘루드윅 : 베토벤 더 피아노’을 진지하게 한 번 더 관람해 보실 것을 권합니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제공 | 과수원뮤지컬컴퍼니

※ 일일공프로젝트는 ‘일주일에 한편 공연보기’ 프로젝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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