관세 리스크 푼 7대 그룹, 1305조 ‘미래 투자’로 화답

한미 관세협상이라는 거대한 불확실성이 걷히자, 대한민국 재계가 1305조 원이라는 천문학적인 ‘미래 투자’ 보따리로 화답했다. 이는 단순한 설비 확충을 넘어, 반도체와 인공지능(AI)을 필두로 한 기술 패권 전쟁에서 한 치도 물러서지 않겠다는 강력한 의지의 표명이다.

16일 용산 대통령실에서 열린 ‘한미 관세협상 후속 민관 합동회의’는 정부가 대외 리스크를 제거하고 기업이 과감한 투자로 화답하는 ‘민관 원팀’의 전략적 방향을 확인시킨 상징적 장면이 되었다. 7대 그룹 총수들이 제시한 청사진은 향후 10년 대한민국 경제의 명운을 좌우할 중대한 승부수다.

이날 회의에서 이재용 삼성전자 회장, 최태원 SK 회장, 정의선 현대자동차그룹 회장, 구광모 LG 회장 등 4대 그룹 총수를 비롯해 정기선 HD현대 회장, 여승주 한화그룹 부회장,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이 일제히 투자 계획을 밝혔다.

삼성이 향후 5년간 450조 원, SK가 용인 반도체 팹에만 600조 원, 현대차가 5년간 125조 원, LG가 5년간 100조 원을 약속하며 4대 그룹이 투자를 주도했다. 여기에 HD현대 15조 원, 한화 11조 원, 셀트리온 4조 원이 더해져 총 1305조 원의 막대한 자금이 국내 산업 생태계에 수혈된다.

●반도체·AI, 1050조 승부수
투자의 핵심은 단연 ‘반도체’와 ‘AI’다. 삼성은 450조 원의 투자액 중 상당 부분을 평택 5라인 신설(2028년 가동 목표) 등 반도체 생산라인 확충에 집중한다. 이와 함께 6만 명 신규 고용을 약속하고, 삼성SDS를 통해 전남과 경북 구미에 AI 데이터센터를 구축해 지역 균형 발전을 도모한다. 삼성SDI는 유력 후보지인 울산에 전고체 배터리 생산 거점을 추진한다. SK는 반도체 수요 확대와 공정 첨단화에 대응해 용인 반도체 팹에만 600조 원 투입이라는 파격적인 청사진을 제시했다. 이는 8600억 원 규모의 ‘트리니티 팹’을 통한 소부장(소재·부품·장비) 생태계 강화와 맞물려, 엔비디아·AWS 등과 협력하는 ‘글로벌 AI 허브’ 전략의 심장이 될 전망이다.

반도체가 ‘지키는 싸움’이라면, 미래 모빌리티와 소부장은 ‘미래를 여는 전장’이다. 정의선 현대차그룹 회장은 2026년부터 5년간 125조 원을 국내에 투입한다. 이 중 50조 원이 소프트웨어중심차량(SDV)과 AI 반도체, 수소에너지 등 미래 신사업 역량에 배정됐으며, 39조 원은 R&D 및 기존 경쟁력 강화에 쓰인다. 특히 정 회장은 2030년까지 자동차 수출을 현재 대비 2배 이상 확대하겠다는 공격적인 목표를 제시하며 관세 리스크 해소에 대한 자신감을 내비쳤다.

구광모 LG그룹 회장은 ‘질적 성장’에 집중한다. 5년간 100조 원의 국내 투자액 중 60%인 60조 원을 소부장 기술 개발과 확장에 배정했다. 이는 산업 기반 강화가 곧 글로벌 경쟁력이라는 판단 아래, 국내 생태계의 체질을 근본적으로 개선하겠다는 전략이다.

● 방산·바이오도 힘 보탠다
4대 그룹이 전면에서 이끄는 동안, HD현대, 한화, 셀트리온도 각자의 주력 분야에서 힘을 보탰다. 정기선 HD현대 회장은 5년간 15조 원 투자를 약속하며, AI 시대 핵심인 에너지·로봇 분야(8조 원)와 조선·해양의 디지털 전환(7조 원)을 동시에 추진한다.

여승주 한화그룹 부회장은 미국 필리조선소 인수와는 별개로, 국내 조선·방산 분야에 5년간 11조 원을 투자해 2030년까지 협력사 매출을 2배 이상(21조 원) 성장시키겠다는 ‘동반 성장’ 청사진을 제시했다.

서정진 셀트리온 회장 역시 3년간 4조 원을 송도·오창·예산에 투입해 생산 능력을 확충하고, R&D 비용을 1조 원 규모까지 늘려 원부자재 국산화와 ‘바이오 주권’ 강화에 앞장서겠다고 밝혔다.


원성열 기자 sereno@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