다시꽃핀라디오시대

입력 2008-02-13 09:26:1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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메마른 세상, 생생한 아날로그식 소통의 오아시스 “저는 홈쇼핑 쇼호스트입니다. 오늘의 마지막 방송을 방금 마쳤어요. 저의 가장 소중한 보물은 ‘마음속 열정’입니다.” 12일 오전 3시 40분 서울 여의도 MBC 본사 7층 라디오 스튜디오. 청취자 사연을 실시간으로 받아 소개하는 FM 프로그램 ‘뮤직 스트리트’ 2부가 ‘생방송’ 중이다. 오늘의 주제는 ‘당신의 보물은 무엇인가요?’ 작가 김동영(30) 신경민(27) 씨는 휴대전화와 인터넷 홈페이지를 통해 쏟아져 들어오는 사연을 정리하느라 눈코 뜰 새 없다. 21세기 영상 매체가 범람하고 있는데도, 라디오는 이처럼 생생하다. 영화 ‘라디오 스타’의 흥행에 이어 같은 이름의 뮤지컬과 TV 쇼 프로그램이 나왔고 최근에는 영화 ‘라듸오 데이즈’도 개봉됐다. 컴퓨터와 MP3플레이어를 이용해 인터넷으로 제공되는 라디오 방송을 듣는 이도 늘고 있다. 특히 최근에는 라디오가 진실을 쌍방향으로 소통할 수 있는 매체로 각광받고 있다. 깊은 밤 라디오로 세상과 소통하려는 이들이 많은 것도 그 덕분이다. 그들은 누구일까. 그들에게 라디오는 어떤 의미일까. ○ 오전 3시, 라디오는 바쁘다 붉은색 ‘ON AIR(방송 중)’ 표시등이 켜진 스튜디오 안에는 손한서(32) PD와 프로그램 진행자인 문지애(25) 아나운서가 나란히 앉아 있다. 진행자가 하나의 주제를 건네면 청취자가 이야기를 보내오는 단순한 시스템. 내심 ‘누가 이 시간에 사연을 보낼까’ 한 기자의 예상은 보기 좋게 빗나갔다. 한 시간 동안 쌓인 메시지가 휴대전화와 인터넷 홈페이지를 합쳐 2000건이 넘었다. 방송사 건물 밖은 오가는 차가 거의 없어 쥐죽은 듯 적막한 시간이지만 스튜디오에 앉은 PD와 작가, 아나운서는 사연을 골라 소개하느라 쉴 틈 없이 분주했다. 쇄도하는 사연의 극히 일부를 빠듯이 소개하고 신청받은 노래 7곡을 틀고 나니 순식간에 한 시간이 지났다. 한 청취자는 ‘지난해 돌아가신 할머니가 손에 쥐여주셨던 2000원’을 보물로 꼽았다. “제가 세상을 떠날 때까지 이 2000원은 쓰지 못하겠죠.” “지금 어디 계신지 모르는 어머니와 어릴 때 찍은 사진 한 장이 제 보물입니다. 어른이 되면 어머니를 찾아서 꼭 안아드릴 거예요.” ‘제대할 때 했던 다짐’이 보물이라는 취업준비생, 환자 차트 기록에 쓴 볼펜심을 모은다는 야간당직 간호사, 군입대한 남자친구와 함께 갔던 식당의 냅킨을 소중히 모아 온 여학생…. 손 PD는 “소통의 갈증을 풀지 못한 사람들이 깊은 밤 라디오 앞에 모이는 것 같다”며 “얼굴을 볼 수 없지만 목소리로 안부를 확인하는 장거리 전화 같은 특별한 정겨움과 진실한 소통이 라디오에 있다”고 말했다. ○ 진실을 소통하는 미디어 오직 소리뿐인 라디오의 생명은 진실성이다. ‘괴짜 심리학’의 저자인 리처드 와이즈먼 영국 하트퍼드셔대 심리학 교수는 BBC와 공동으로 진행한 실험을 통해 ‘목소리’가 진실과 거짓을 판단하는 가장 중요한 기준이라고 밝혔다. 한 출연자의 진담 인터뷰와 거짓말 인터뷰를 TV와 라디오를 통해 내보내는 실험을 한 결과, TV 시청자는 어느 쪽이 진담인지 거의 맞히지 못한 반면 라디오 청취자는 73%가 진실을 가려냈다. 와이즈먼 교수는 “거짓말을 할 때 시선이나 손동작은 통제하기 쉽지만 사용하는 단어와 말하는 방식을 통제하는 것은 어렵다”고 그 이유를 설명했다. 조용한 심야 방송뿐 아니라 시끌벅적한 저녁 생방송에서도 소통의 진실성은 더욱 중요하다. 오후 6시부터 2시간 동안 KBS 2라디오 ‘초저녁 쇼’를 진행하는 김구라(38) 씨는 “진행자가 조금이라도 거짓된 말을 하면 청취자는 바로 알아챈다”고 말했다. “반응이 바로 오죠. 혼자 계속 많은 이야기를 해야 하니까, 사실과 다른 말을 하면 언젠가 같은 소재를 언급할 때 들통 나거든요. 편안하게 앉아서 이야기하지만 긴장할 수밖에 없어요.” ○ 쌍방향의 상상력은 확장된다 ‘쌍방향성’이 뉴미디어의 특성이라고 하지만, 라디오는 오래전부터 이를 구현해 왔다. 며칠 걸려 도착하던 우편엽서 사연이 실시간 메시지로 바뀌었을 뿐이다. 다매체 시대에도 라디오만큼 쌍방향 소통에 대한 갈증을 해소해 주는 매체를 손꼽기 어렵다는 분석이다. ‘라디오 스타’ 등 라디오를 소재로 한 문화 콘텐츠에 대한 관심이 커지는 것도 이런 까닭이다. 문지애 아나운서는 “이별의 아픔이나 시험 걱정에 잠이 안 온다며 전화를 걸어오는 청취자와 솔직한 이야기를 나누다 보면 나도 위로받는 기분이 든다”고 말했다. 곽금주 서울대 심리학과 교수는 “감각을 분산하는 TV의 메시지는 청각에 집중하는 라디오의 정확성과 진실성을 따를 수 없다”며 “매체가 다양해질수록 복잡한 자극을 피해 편안하고 상상력 넘치는 소리 메시지에 대한 수요가 점점 더 커질 것”이라고 전망했다. 손택균 기자 soh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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