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창호의 바둑은 쉽다. 상대가 어지간히 건드리지 않는 한 본인이 먼저 시비를 거는 일도 없다.
상대가 유연하게 나오면 이쪽도 유유히 강물처럼 흐르고, 상대가 격랑을 일으키면 참고 참다가 도저히 안 되겠다 싶으면 그제서야 몸을 일으킨다.
그런데 그게 더 무섭다.
상대는 유연하게 두면 유연하게 지고, 격렬하게 두면 격렬하게 진다. 더 곤란한 것은 자신이 왜 졌는지도 모르게 진다는 것. 부슬부슬 내리는 가랑비에 몸이 흠뻑 젖어버린다. 아픈 줄도 모르고 골병이 든다. 환장하고 미칠 노릇이다!
<실전> 흑1로 붙이니 백이 2로 젖혀 반발했다.
<해설1> 백1로 받으면 흑2로 빠지는 수가 귀에 대해 선수가 된다. 백은 3으로 지켜야 한다.
<실전>은 백이 귀의 집을 5집 정도 늘렸다. 그러나 백△ 한 점이 잡힌 것이 아프다. <실전> 흑7로 미끄러지자 백이 8로 건너 붙였다. 맥점이지만 권오민은 이 수를 후회했다. 흑15까지 흑이 쉽게 살아버려서는 흑이 드디어 주도권을 쥐게 된 것이다.
<해설2> 백1로 막는 것이 정답이다. 흑2·4에는 백도 3·5로 받아주어 그만. 이 그림이 <실전>에 비해 좋다. 백은 이렇게 두었어야 했다.
권오민은 수긍하지 않을지 모르겠지만 승부는 여기서 났다. 이후의 진행은 가랑비에 쉼 없이 옷이 젖었을 뿐이다. 수순은 200 여 수가 넘게 이어졌지만, 결국은 이창호의 완승을 확인하는 지루한 작업이었을 뿐이다.
바둑판 위로 이창호란 이름의 비가 내린 바둑이었다.
<205수, 흑 불계승>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해설=김영삼 7단 1974yskim@hanmail.net