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형모의Black&White]초시계가기가막혀

입력 2008-07-04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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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초시계가 고장나서 시간패를 당했는데 어쩌란 말입니까?” 한국기원 사무국을 찾아온 한 프로기사가 ‘항의 반’ ‘하소연 반’의 볼멘소리를 하고 있습니다. 말인즉슨 원익배 십단전 예선결승전 대국을 두고 있는데 마지막 초읽기 순간에 그만 시계가 작동을 하지 않는 바람에 시간패를 당하고 말았다는 것이었습니다. 이 기사는 최근에만 두 번째 같은 경우를 당했습니다. 평소 온순하고 얼굴 붉히는 일이 좀처럼 없는 사람인데 이날만큼은 어지간히 화가 났는지 목소리가 카랑카랑했습니다. 하지만 박수도 두 손바닥이 마주쳐야 소리가 나는 법. 항의를 하던 프로기사는 한국기원이 묵묵부답이자 결국 어깨를 내린 채 발길을 돌려야 했습니다. 대국장의 초시계가 고장을 일으켜 시간패를 당한 사례는 이번뿐이 아닙니다. 올 들어서만도 한국물가정보배(이희성 시간패·안조영 시간패), KBS바둑왕전(유창혁 시간패), 박카스배 천원전(조훈현 시간패) 등이 줄줄이 있었습니다. 문제의 발단은 한국기원이 기존의 초시계를 최근 신형 디지털 초시계로 교체를 했는데, 이 시계가 왕왕 오작동을 일으키고 있다는 것이지요. 그 동안 프로기사들이 문제점을 숱하게 지적했지만 한국기원의 대응책은 사고가 발생할 때마다 고장난 시계를 회수하는 것이 전부였습니다. 사고가 터질 때마다 ‘즉석 땜빵’ 수준의 대처를 하고 있으니, 한 마디로 말해 프로기사들의 존엄한 공식 대국장이 고장난 시계를 찾는 임상 실험장이 되고 있는 것이나 마찬가지로군요. 한국기원 집행부에서는 이 문제가 자꾸 불거지자 ‘고장이 없는 일본시계’를 수입해다가 쓰자는 얘기도 나왔다고 합니다. 그렇다면 우리나라 대국장에서 초읽기가 시작될 때마다 ‘이찌 … 니 … 싼 …’하고 일본어로 초를 읽는다는 얘기인데, 이 또한 황당한, 지극히 행정주의적인 발상이 아닌가 싶습니다. 반집을 다투는 치열하고도 신성한 프로의 승부가 초시계 불량 따위에 영향을 받는다는 것은 지나가던 소가 웃을 일이 아닐 수 없습니다. 대국장의 초시계가 프로기사 개인의 지참물이 아닌 다음에야 시계 고장으로 인해 시간패를 당하는 피해자에 대한 구제책은 반드시 마련되어야 할 것입니다. 그저 지금의 한국기원처럼 “불량 시계가 걸리는 것은 운수소관” “고장난 시계는 극소수일 뿐” 식의 반응은 “미국산 소고기 먹어도 광우병 걸리는 사람은 거의 없다”라는 정부의 논리와 다를 게 없습니다. 적어도 세계 최강이라는 한국바둑계에서 프로기사들이 바둑을 두기 전 ‘오늘은 제발 멀쩡한 시계가 걸리길’하고 기도하는 일은 없어야 할 것입니다. 실력을 제외한 그 어떤 불순물도 신성한 ‘승부’에 개입되어서는 안 될 일입니다. 평등함과 투명함이 반상에서 구현될 수 없다면, 그것은 이미 바둑이 아닐 것입니다. 양형모기자 ranb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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