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형모의Black&White] 7080의추억같은승단대회

입력 2008-07-18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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또 한 명의 입신이 탄생했습니다. 올해 22세가 된 열혈청년 송태곤 8단, 아니 이제 9단이지요. 송태곤은 지난 10일에 벌어진 농심신라면배 세계바둑최강전 국내선발전에서 유창혁 9단에게 바둑은 졌지만 승단기준 판수와 점수를 채워 ‘바둑에 관한 한 신의 영역에 첫 발을 들였다’라는 입신의 반열에 올랐습니다. 요즘은 주요 기전의 성적(엄밀히 따지면 예선 첫 대국)을 갖고 승단점수를 매기지만, 2002년까지만 해도 승단대회란 것이 있어 프로기사들은 이 대회를 통해 승단을 했지요. 1년에 두 차례, 봄과 가을에 한 번씩 열렸습니다. 재미있는 것은 이 승단대회가 프로들이 출전하는 대회 중 유일하게 치수제로 진행되었다는 사실입니다. 본시 프로란 9단과 초단이 만나도 호선으로 ‘맞짱’을 뜨는 것이 대원칙인데 승단대회에서만큼은 고색창연한 치수제가 엄존했지요. 그렇다고 9단과 초단이 승단대회에서 만날 일은 없었습니다. ‘어허! 9단이 어찌 초단과 겸상을!’이란 것은 아니었겠지만 초단부터 5단까지는 을조, 그 이상은 갑조라 하여, 나누어 대회를 열었습니다. 같은 단끼리는 호선으로 두되 덤이 6집반이 아니라 6집이었습니다. 1단 차이가 나면 4집, 2단은 2집, 3단은 정선으로 두며 4단 차이가 나면 오히려 흑이 백에게 2집을 덤으로 주었습니다. ‘반집’의 개념이 없다보니 무승부도 부지기수로 나왔지요. 게다가 위로 올라갈수록 승단이 너무너무 힘들었습니다. 나이 지긋한 중년기사들로선 싱싱한 젊은이들을 상대로 호선으로 버티기도 괴로운 판국에 오히려 덤을 내주고 있으니 승률이 좋을 리가 없겠지요. 이래저래 승단대회는 프로기사들에게 ‘애물단지’ 또는 ‘계륵’같은 존재였습니다. 그러다보니 승단대회 참가율은 점점 더 떨어졌지요. 승단대회는 대국료가 한 푼도 없었다는 점도 저조한 참가율에 부채질을 했을 겁니다. 급기야 이세돌의 경우 당당하게 ‘승단대회에는 나가지 않겠노라’라고 선언을 하기도 했습니다. 2002년 후지쯔배에서 우승해 ‘세계 최강의 3단’이라 불렸던 이유는 기실 그가 승단대회를 나가지 않아 승단이 정체되어 있었던 때문이지요. 결국 2003년, 일부 프로기사들과 한국기원 사무국이 머리를 맞대고 고민한 끝에 승단대회를 폐지하기로 결정했고, 이후 몇 번의 수정을 거쳐 현재의 승단기준이 만들어지게 되었습니다. 승단대회가 아직 남아있던 시절, 당시 새로 생긴 특별승단 기준에 의해 1996년 유창혁과 이창호가 나란히 9단으로 승단했습니다. 입신 소감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이창호의 첫 마디는 이러했습니다. “무엇보다 더 이상 승단대국을 두지 않아도 돼 기쁘다. 앞으로 9단이 되기 위해서는 승단대국만 20국 정도를 더 두어야 하는데 요즘 기전 스케줄이 많아 부담스러웠다.” 말도 많고 탈도 많았지만 정과 추억이 지문처럼 남아있던, 담배 연기 자욱했던 한국기원 2층 승단대회장. 7080의 그림자처럼, 가끔은 그리운 정경입니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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