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영은이상우의행복한아침편지]엄마세탁기한대꼭놔드릴게요

입력 2009-01-13 00:00:00
카카오톡 공유하기
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1


저는 세탁기를 9년 째 쓰고 있습니다. 이 녀석도 수명이 다했는지 요즘엔 세탁기 한 번 돌리려고 하면 소음이 엄청납니다. 그래서 빨래 한 번 하려고 하면 시끄럽다고 툴툴거리는 애들 눈치며, 아랫집 눈치까지 봐야합니다. 그럼 저는 애들에게 “엄마도 이 세탁기 쓰고 싶어서 그런 거 아니거든? 짠돌이 아빠 때문에 어쩔 수 없이 쓰고 있으니까 시끄러우면 아빠한테 말해”라고 괜히 핀잔을 줬습니다. 그런데 얼마 전 동네 전자대리점에서 개업 2주년 기념으로 최신형 드럼세탁기를 선착순 세 명에게 반값으로 준다는 게 아니겠어요? 그래서 저는 이때가 기회다 싶어서 퇴근한 남편을 붙들고 세탁기 하나 새로 사자며 설득을 했습니다. 하지만 남편은 제 사정은 생각지도 않고 멀쩡한 세탁기를 왜 바꿔야 하냐며 도리어 화를 냈습니다. 거기다 “그거 선착순으로 파는 거면 당신 같은 아줌마들이 새벽부터 줄 서서 기다릴 텐데, 아침 잠 많은 당신이 가능이나 하겠어?”라면서 저를 약 올렸습니다. 저는 그 말을 듣자 오히려 오기가 생겨 “그냥도 아니고 반값에 판다는데, 이럴 때 사는 게 돈 버는 거야. 내가 책임지고 사올 테니까 당신은 걱정하지도 마!”라고 말하고 다음 날 세탁기를 사기 위해 저녁 9시도 안 된 시각에 잠을 청했습니다. 정확히 새벽 3시에 일어나서, 남편 아침상을 챙겨놓고, 손 난로와 작은 담요까지 챙겨서 집 앞 전자대리점으로 갔습니다. 그리고는 대리점 앞에서 6시간을 기다린 결과, 선착순 세 명에 들 수 있었습니다. 그 날 오후 바로, 드럼세탁기가 집으로 배달돼 왔습니다. 저는 들뜬 마음에 일단 밀린 빨래부터 돌려봤습니다. 세탁기는 너무도 조용하게 돌아갔고, 옷에 구김도 많이 생기지 않아 정말 좋았습니다. 지난 주말, 고향에서 동창회가 있어서 친구들도 만나고, 친정엄마도 만날 겸, 겸사겸사 친정에 들렀습니다. 그런데 엄마가 빨래를 다 하시고 마지막에 맨손으로 옷들을 꾹 짜고 계시는 거였습니다. 저는 “엄마. 관절도 안 좋으면서 왜 세탁기 두고 손으로 짜요?” 하니까 “세탁기에 탈수기능만 고장이 났어. 하지만 뭐 나 혼자 사는데, 빨래거리가 몇 개 되냐? 그냥 이렇게 손으로 짜면 된다”고 하셨습니다. 저는 집에서 드럼세탁기를 쓰는데, 엄마는 탈수기능도 안 되는 고장난 세탁기를 쓰고 계시다니…그 모습에 가슴이 아팠습니다. 그래서 집에 돌아가기 전에 엄마에게 급한 대로 탈수기라도 사서 쓰시라며 얼마 되지 않는 돈을 드렸습니다. 엄마가 괜찮다며 끝까지 손사래를 치셨습니다. “너! 괜히 올라가서 네 언니나 오빠한테 세탁기 얘기하지 말아라. 세탁기의 ‘세’자도 꺼내지 마 알았지?” 하고 당부하셨습니다. 그 모습에 괜히 속이 상했습니다. 남편한테 얘기 잘 해서 우리 엄마 세탁기 하나 사드려야겠습니다. 아무래도 이러라고 드럼세탁기가 반값에 제 손에 들어왔나 봅니다. 인천 서구|이경숙 행복한 아침, 왕영은 이상우입니다



뉴스스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