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왕영은이상우의행복한아침편지]운동회에얽힌추억

입력 2009-06-01 17:02:22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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얼마 전 애들 운동회가 있었습니다. 물도 시원하게 얼리고, 김밥도 싸고, 돗자리도 챙겨들고 애들 학교로 갔습니다.

운동장에는 만국기가 휘날리고, 노란 체육복 입은 아이들이 마치 봄 햇살 쬐러 나온 병아리들 마냥 너무 귀엽고 사랑스럽더라고요.

초등학교 5학년, 3학년 저희 집 두 아이가 달리기를 했는데요. 이 녀석들이 둘 다 꼴찌를 한 겁니다. 어떻게 한 녀석도 등수에 못 들어갔는지 제가 서운해서 뭐라 했더니 남편이 “아니 애들이 잘 달릴 수도 있고 못 달릴 수 도 있지. 뭐 그런 걸 가지고 화를 내?”하면서 절 타박하는 겁니다.

결국 아빠 닮아 그렇다는 둥, 엄마 닮아 그렇다는 둥, 저희 부부 는 옥신각신 했는데요.

사실 솔직히 말해서, 애들 꼴찌하는 것 아마 절 닮아 그랬을 겁니다.

제가 매번 운동회 때마다 꼴찌는 떼어 놓은 당상이었거든요.

오죽하면 저희 엄마께서 “어이구~ 내가 고무신 신고, 달리기를 해도 니보다 낫것다”하면서 자주 면박을 주셨거든요.

그런데 어느 날, 저희 엄마께서 제게 아주 솔깃한 제안을 하셨습니다. “니, 이번 운동회에 1등 하모, 엄마가 ‘산딸’사주께. 통장 집 경숙이가 샀다 카던 그 빨간 산딸, 니 갖고 싶다 캤재? 내 사주께” 이러시더라고요. 엄마가 말씀하신 ‘산딸’은 바로 ‘샌들’입니다. 저는 귀가 솔깃해서 그 날부터 뚝방으로 뜀박질을 하며 달리기 연습에 들어갔습니다.

그런데 아무리 연습해도 1등 할 실력은 안 되고…

저는 고민하다가 드디어 기가 막힌 아이디어를 생각해냈습니다.

1등 한 아이가 도장을 받을 때 그 옆에 서 있다가, 그 도장이 채 마르기 전에 얼른 제 손목으로 옮겨 찍는 거였지요. 두 손목을 포개서 꾹 누르고 있으면 금방 도장이 옮겨 찍힐 것 같았습니다.

그래서 저는 달렸다하면 1등만 하는 6반 순자를 찾아갔습니다. 사정 얘기를 하고, 도움을 받기로 했지요. 마침 엄마는 밭일이 고되셔서 그랬는지, 시원한 나무 그늘 아래서 손부채질을 하시다가 스르르 잠이 들어 계셨습니다.

드디어 달리기가 시작됐습니다. 저는 제 달리기는 대충하고, 순자가 몇 등하나 그것만 촉각을 세우고 지켜봤습니다. 저는 순자가 1등으로 들어오자마자 바로 그 옆에 서 있다가, 순자가 팔뚝에 받은 도장을 그대로 제 팔뚝에 옮겨 찍었습니다. 순자의 팔뚝에 있던 1등 도장은 제 팔뚝으로 희미하게 옮겨왔고, 저희 둘은 신이 나서 두 손을 잡고 팔짝팔짝 뛰었습니다.

그리고 엄마는 약속대로 제게 빨간 샌들을 사주셨습니다. 빨간 끈 하나가 발목을 감고 복숭아 뼈 옆에 있는 후크에 탁 걸리는 정말 예쁜 샌들이었습니다. 저는 그 신발이 너무 좋아서 밤에 잘 때도 꼭 끌어안고 자고, 한번 신고 나면 광이 날 때까지 닦아놓곤 했습니다.
그런데 운동회가 끝난 후부터 이상하게 몸이 가려웠습니다.

가려운 팔뚝을 벅벅 긁어대기도 했는데, 언제부턴가 몸 여기저기에 빨간 반점이 생기기 시작하더군요. 그걸 보시더니 저희 엄마께서 “야가, 와 이카나? 니 뭐 잘못 묵었나? 혹시 이거 수두 아이가? 니 수두 걸렸나” 이러시는 겁니다. 엄마는 저를 작은 방에서 절대 못 나오게 하시고, 가족들도 근처에 못 가게 했습니다.

그리고 얼마 후. 수두가 다 나서 학교에 갔는데, 순자가 저랑 똑같이 수두에 걸렸다는 얘길 하더라고요. 그러니까 순자한테서 1등 도장을 받을 때, 그 때 수두도 같이 옮겨온 거였습니다.

참, 샌들 한번 받으려고 제 딴엔 열심히 머리를 굴렸는데, 이런 반전이 있을 줄이야… 아이들 운동회 다녀오니 문득 그 옛날 학창시절이 떠오르네요.

대구 동구 | 박주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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