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O2/커버스토리] 제 2의 ‘올드보이’가 되지 못한 ‘백야행’

입력 2009-12-13 09:5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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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이리스' 포기한 손예진의 '백야행'이 의외로 잠잠했던 이유

창작 시나리오가 아닌 소설이나 만화를 원작으로 삼는 경우, 필연적으로 영화는 몇 가지 고민해야 할 과제를 안게 된다. 원작의 후광을 어떻게 할 것인가, 스토리의 어느 부분까지를 차용할 것인가, 인쇄되어 있는 활자를 어떻게 영화적 언어로 바꿀 것인가, 등등.

영화 '백야행'은 일본의 유명한 추리소설 작가 히가시노 게이고의 동명 소설을 원작으로 하는 작품이다. 일본에서 출간 당시 베스트셀러였을 뿐만 아니라 인기 드라마로도 제작되었고, 한국에서도 두터운 팬 층을 가지고 있다. 지난 4월 개봉한 '용의자 X의 헌신' 역시 히가시노 게이고의 소설이 원작이다. 따라서 영화 '백야행'의 고민은 클 수밖에 없다.

원작의 소재나 골격만을 차용하여 이야기를 새로 쓰는 영화들도 있지만, 영화 '백야행'은 원작에 충실했다. 또한 원작의 후광을 숨기지 않고 오히려 전면적으로 내세웠다. 그리하여 단숨에 인지도를 높이는 마케팅 효과를 톡톡히 누렸다. 하지만 이 때문에 높아진 관객들의 기대치에는 부응했을까.


▶ 히가시노 게이오의 대작 '백야행'

소설 '백야행'은 스토리의 구성에 있어 방대한 분량을 가졌다. 일반적인 독자라면 아마도 등장인물들의 계보라도 그려가며 읽어야 했을 것이다. 원작은 유키호 (영화 속 유미호, 손예진 분)와 기리하라 료지(영화 속 김요한, 고수)가 어릴 적 사건으로부터 어떻게 성장해 나가는 지, 또 어떻게 성인이 되어 살아가는 지 각각의 삶을 자세하게 묘사한다.

그리고 이 와중에 점점 의식적으로 밝은 태양 속으로 걸어가는 유키호와 이와는 반대로 자신의 발자국을 지워가며 어둠 속으로 숨어드는 료지의 다른 삶이 처절하게 대비된다. 비뚤어져만 보이는 이들의 삶이 어떠한 비극으로부터 시작되었는지 밝혀지는 순간, 끝내 구원받지 못한 이들에 대한 연민으로 독자들은 가슴을 쓸어내리게 된다. 거미줄처럼 얽혔던 사건의 전모가 풀리면서 복잡다단한 인물들의 내면세계를 이해할 수 있는 답을 동시에 얻게 되기 때문이다.

소설 '백야행'을 영화로 옮긴다는 소식에 팬들의 기대는 작지 않았다

 소설 '백야행'을 영화로 옮긴다는 소식에 팬들의 기대는 작지 않았다



사실 이 모든 것을 두 시간짜리 영화에 모두 담기는 애초부터 불가능한 일이었다. 원작 소설을 읽은 독자라면 영화화 소식을 들었을 때 가장 먼저 떠오른 것도 이것이었을 것이다. 원작의 어떤 것을 취하고 어떤 것을 버릴 것인가, 라는 질문 말이다.

먼저 영화는 스토리의 함축이라는 측면에서 어느 정도 성공을 거두었다. 영화의 시간대를 14년 전 사건이 일어난 과거와 현재라는 두 가지 시점으로 한정하고 양 시간대를 교차 편집하여 사건의 전모를 설명한 것은 효율적인 선택이었다. 과도한 플래시백이 조금은 현기증을 유발하기도 했지만, 아예 처음부터 현재 일어나고 있는 사건들의 범인이 누구인지 드러낸 것은 함축된 스토리의 이해를 돕기 위한 재치 있는 설정이었다. 사건의 단초로 새롭게 고안된 '백조의 호수'라는 음악 역시 영화의 장점을 충분히 살린 지능적인 장치였다.

하지만 캐릭터들을 그려내는 데에는 실패했다는 느낌을 지울 수 없다.


▶ 의외로 평면적인 인물로 그려진 '요한'과 '미호'

박신우 감독은 한 언론과의 인터뷰에서 (CINNNO 12월호) '원작에서 느꼈던 작품의 매력을 최대한 살리는 것이 목표'였으며, 그가 생각하는 '원작의 매력은 캐릭터' 라고 밝혔다.

그런데 이상하다. 캐릭터의 표현이 관건이라면 그 누구보다도 이 영화의 주인공인 두 인물, 유미호와 김요한을 제대로 이해할 수 있어야 한다.

그러나 영화 속 그들은 아픈 상처를 가지고 그 상처의 법적인 공소시효가 끝날 때까지 사건을 덮으려는, 그러기 위해서 지속적으로 범죄를 저지를 수밖에 없는 평면적인 인물에서 벗어나지 못한다. 어린 시절 비극이 이들의 인격 형성에 어떻게 작용했는지, 그리고 둘 사이의 관계는 어떻게 형성되어 갔는지, 어떠한 감정의 화학작용이 그 안에 감추어져 있는 지에 대한 설명은 찾아보기 힘들다.

영화 '백야행'은 소설의 높은 완성도를 기대한 팬들에게는 한 없이 실망스러운 작품이었다

 영화 '백야행'은 소설의 높은 완성도를 기대한 팬들에게는 한 없이 실망스러운 작품이었다



지하철 물품 보관소를 통해 은밀히 쪽지만 주고받던 이들은 영화 종반부에서 갑자기 감정을 폭발시키며 서로가 사랑하는 사이임을 주장한다. 하지만 이들의 눈물에 몰입하기엔 이런 행동이 느닷없어 보인다. 전반부에 사건을 함축하기에 바빴던 영화가 시간에 쫓기듯 캐릭터들을 설명하는 데 분주해졌기 때문이다.

유년기에 가해진 치명적인 상처, 그로 인해 비뚤어져 버린 자의식, 어린아이지만 자신의 부모들을 살해하고 이를 은폐한 섬뜩함, 이후로 지속된 죄의식 없는 범죄, 서로에게 가까이 다가가지 못한 채 주위를 맴도는 애틋함, 상식적으로는 이해하기 어려운 료지(요한)의 유키호(미호)에 대한 헌신 등, 원작에서는 끝없이 독자들의 상상력을 자극하며 그토록 집요하게 그려내려 했던 두 주인공의 많은 내면이 지워졌다. 그리고 그 부분을 한동수 (한석규 분)라는 제 3의 인물이 채워버렸다.


▶ 원작을 담기엔 스크린이 너무 작았다

소설 속에서 문학적으로 묘사된 이들의 내면을 영화에서 풀어내기에는 상당한 고민이 뒤따랐을 것이다. 더구나 책을 읽는 독자들과는 달리 영화 관객들은 스크린이 보여주는 것을 수동적으로 받아들이기 마련이다. 하여 화자의 역할을 대신해 줄 형사의 역할이 커졌을 수 있다. 만일 한동수가 이 역할을 제대로 했다면, 원작과는 또 다른 시선으로 주인공들의 내면을 들여다보는 맛을 주었을 것이다.

하지만 그러기에 한동수는 너무 자신의 문제에 몰두해 있다. 두 주인공을 관찰하며 그들의 다면적 캐릭터를 이해할 실마리를 던져주기 보다는, 사건 현장에서 사고로 죽은 아들에 대한 죄책감과 이로 인해 자신이 받은 상처가 모든 행동의 원동력이 되는 듯 보인다.

기성세대의 잘못에 대한 도의적인 죄책감으로 집착이 커진 객관적인 형사가 아니라, 어두운 밤에 아들을 폐 선박으로 데려가 위험해 보이기 그지없는 환기구로 밀어 넣은(하필이면!) 한 무모한 실수로 좌초된 아버지의 느낌이다.

배우 '손예진'이 없었더라면 영화 '백야행'은 평범한 작품이 됐을 공산이 컸다.

 배우 '손예진'이 없었더라면 영화 '백야행'은 평범한 작품이 됐을 공산이 컸다.



마지막 장면에 한동수가 요한에게 '그 때 너를 잡지 못해서 미안하다'고 외치는 장면이 깊은 울림을 주지 못하는 것은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일 것이다. '사랑한다'고 울던 미호가 죽어가는 요한을 모른다고 부인하는 장면이 그다지 애처롭지도, 섬뜩하지도 않은 것 역시 이 때문일 것이다.

애써 설명해 놓은 사건에 대한 스릴러적 긴장감은 캐릭터들을 조급하게 부각시키면서 사라져버리고, 거꾸로 캐릭터들은 개연성이 떨어지는 설정으로 충분히 이해할 수 없게 되어 버렸다.

하지만 이러한 조건에도 불구하고 배우들의 연기는 상당히 훌륭했다. 베테랑 배우들답게 캐릭터의 불완전함을 최대한 보완해 주었다.

오랜만에 스크린으로 복귀한 한석규는 날카로운 눈빛과 카리스마로 충분한 무게감을 보여주었고, 군 제대 후 역시 오랜만에 스크린에 돌아온 고수도 기대치 이상의 연기를 해냈다. 창백할 정도의 흰 얼굴에 인공적인 미소를 가득 담아 약혼자를 바라보던 손예진은 '미호' 그 자체라 해도 부족함이 없을 정도였다. 아마 표정과 눈빛만으로 그토록 절제된 감정을 잘 소화해낼 수 있는 다른 여배우를 찾기는 쉽지 않을 것이다.


▶ 악조건에서 빛난 베테랑 배우들의 연기

단지 아쉬운 것이 있다면 감춰진 이면의 상처와 잔인함이 수면 위로 제대로 드러나지 않았다는 것인데, 이는 비단 배우 혼자만의 문제가 아니라 전체적인 극의 흐름과 맞물려 있는 것이기에 그녀를 탓할 수만은 없다.

배우들의 연기는 탁월했지만 애당초 '제2의 올드보이'를 꿈꾸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운 작품이었다.

 배우들의 연기는 탁월했지만 애당초 '제2의 올드보이'를 꿈꾸기에는 너무 부담스러운 작품이었다.



한 때 한국 영화계는 일본 소설의 영화화 판권을 사재기하듯 구매했다. 적게는 몇 백만 원이면 구매할 수 있었던 것이 그 몇 배로 가격이 치솟을 정도였고, 이마저도 선점 경쟁이 치열했다. '올드보이'의 성공으로 한껏 그 열기가 과열되었던 것인데, 이러한 열기에 비해 이후 '미녀는 괴로워'를 제외하고는 실제로 영화화되어 성공을 거둔 경우가 거의 없다.

그만큼 한국적인 현실에 맞게, 그리고 영화적 언어로 소설을 변환하는 것이 어렵다는 말이다. 영화계의 전체적인 침체와 더불어 그 어느 때보다도 새로운 영화소재의 검증결과가 절실한 시점이기에, 많은 기대를 모았던 '백야행'의 반쪽 성공이 더욱 아쉬워진다.

소설을 읽지 않고 영화를 본 관객들의 경우 훨씬 후한 평가를 내릴 것이다. 상상력이 돋보인 영화의 미장센 역시 간과하지 말아야 할 이 영화의 미덕이다. 하지만 앞서 말했듯이 유명한 원작을 둔 경우 그 영화는 그 원작이나 그 원작으로부터 파생된 다른 콘텐츠에서 자유로울 수 없다.

양날의 칼이 될 수 있는 원작의 유명세. 그 태생적 부담 속을 걸어온 '백야행'의 영화적 완성도를 어떻게 볼 것인가. 최종 판단은 늘 그렇듯 관객들의 몫이다.

[O2]청순함과 오해의 세칭(世稱) 사이에서, 손예진을 보다

▶'백야행' 개봉 직후 탈진한 손예진
▶매 작품마다 파격적으로 성장해 가는 '괴물'
▶"포장할 것이라면 완벽하게 하고 싶다"


정주현 / 영화진흥위 코디네이터 janice.jh.jung@gmail.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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