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를 만드는 사람의 입장 중엔,
하고 싶어 하는 이야기가 있고, 해야만 하기 때문에 하는 이야기가 있다.
이 영화는 후자에 속한다!
또 영화를 보는 사람의 입장 중엔,
듣고자 하는 이야기가 있는가 하면, 귀 기울여야 하는 이야기가 있기 마련이다.
이 영화는, 역시 후자에 포함되어 있다.
그리고,
난 마땅히 해야 할 이 이야기를 누군가가 귀 기울여 주길 바라며 이 글을 써본다.
한 소녀가, 한 소년에게 나지막이 속삭인다.
부모님이 이혼 했다고, 처음엔 둘 다 나한테 관심도 없으면서 자신과 살겠다며 싸우더라고,
그리고 또 나중엔 서로 안 살겠다고 버리더라고.
누군가에겐 충격으로 다가왔을 이 얘기를 소년은 무덤덤하게 듣고는 무표정하게 넘긴다.
그 또한 다르지 않기에, 소년과 소녀는, 그렇게 다를 것 없는 서로가 맘에 들어 상대를 끌어안으며 아주 잠시 외로움을 잊는다!
소년은 소녀와 헤어져 허름한 집으로 돌아온다.
집에는 몸도 못 가누는 할아버지가 거친 숨을 몰아쉬며 바닥에 누워 있다.
아프냐는 소년의 질문에 할아버지는 차마 그렇다 대답 하지 못한다.
심지어 그는, 병원에 가자며 전화기를 드는 소년의 손을 가로 막는다.
그리곤 그들은 서로를 바라보며 말없이 운다!
네가 몹시 아파 보여서, 또 내가 사무치게 아파서.
소년은 친구와 어울리다 우연히 도둑질을 하고 경찰에 붙잡힌다.
한번만 용서해 달라는 말을 피해자가 무시하고,
또 한 번 되뇌인 그 말을 판사에게 묵살 당하며,
그는 사회로부터 버림 받고 소년원으로 내쳐진다.
그런 그에게 엄마라는 사람이 찾아온다.
소년을 열일곱에 낳고 버린, 한낱 소녀였던 엄마가.
그녀는 돈 한 푼 없이 아는 동생에게 얹혀살며 막연한 죄책감과 충동적인 책임감으로 아들을 데려 온다. 그리곤 둘은 시린 겨울 거리로 함께 쫓겨난다.
그리고 둘은 또 다시 서로를 버린다.
하지만 이것은 그들의 부족함에서 오는 이별이 아니다.
바로 사회가 그들에게 주는 온정의 결핍에서 야기 된 결과이다.
영화는 시종일관 책임과 그에 대한 결핍에서 오는 사회적 악순환에 대해서 묻는다.
그것도 채, 책임이라는 자아가 형성되기 전의, 또 책임을 가르쳐줄 앞선 책임자가 결여된 사람들로부터 그리고 그들을 책임의식 없이 버린 세상으로 부터.
그들은 누군가로부터 끝없이 그것을 부탁하고 애원하며 심지어 구걸하기까지 한다. 그리고 또 다시 겨울 내 봄 싹이 이는 기적처럼, 내 안에도 책임이란, 사랑이란 자아가 자리 잡길 인내하며 어떻게든 세상 안에서 살아가려 발버둥 친다 하지만 정작 가르쳐 주지도, 기다려 주지도, 책임은커녕 어떻게든 하루 빨리 그들을 제거하려하려는 것은 바로 그들이 그리도 갈구 하던 사회 그 자체였다.
감독의 시선은 한 결 같이 사려 깊다.
주요 인물 모두가 불안에 떨며 혼란스러워 서로를 버리고 또 다시 상처를 안길 때조차도 꿋꿋이 그들의 곁에 머물며 온기 깃든 시선을 거두지 않는다.
그 시선은 관객에게 자신이 말하고자 하는 메시지를 거부감 없이 전달하기에 부족함이 없으며, 더할 나위 없이 따스해 보인다.
배우들의 연기 또한 정갈하다.
스타나 독특한 캐릭터의 극에 달한 열연은 없지만, 영화의 두 축을 이루는 엄마(이정현)와 아들(서영주)은 극의 분위기가 허락하는 딱 그 범위 내에서 마치 자신이 처한 상황에 스스로를 얽매고 자신이 연기하는 배역에 꽁꽁 묶인 듯한 사실적인 연기를 선보인다.
영화는 쉬이 결말을 내지도 않는다. 그 대신 조용히 질문을 던진다.
“이 세상 어디에나 있을 이 범죄소년들을 어떻게 하면 좋겠냐고?”
하지만 감독은, 이것이 답을 강요하는 질의가 아님을 밝힌다.
그것이 아무리 심각하고 중요하다 한들 감히 누구에게 강요할 수 있는 일은 세상에 존재하지 않음을 너무나 잘 알기 때문일 것이다.
다만 이것을 만든 이는, 그것을 보고 이 글을 쓰고 있는 나, 또는 이 글을 보고 영화를 볼지 모를 누군가에게 자그맣게 바랄 것이다.
사회에 사소히 만연한 이런 일들이 줄어들길, 또 사회가 이런 이들을 가벼이 넘기지 못하길 그리고 행여 당신이 그들과 우연히 마주쳤을 때, 그저 편견 없이 따뜻한 시선으로 바라봐 주길, 강요 없이 간절한 마음으로.^^;
사진|‘범죄소년’ 공식사이트
글|까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