암 투병 중이던 시절의 윤석화

암 투병 중이던 시절의 윤석화




[스포츠동아 | 양형모 기자] 무대는 끝났지만, 우리는 박수를 멈출 수 없다.
‘1세대 연극 스타’ 배우 윤석화가 19일 뇌종양 투병 끝에 세상을 떠났다. 2022년 연극 ‘햄릿’ 이후 악성 뇌종양 수술을 받고 버텼고, 투병 사실을 알린 뒤 2023년 ‘토카타’에 약 5분 우정 출연한 것이 마지막 무대가 됐다.

그는 ‘신의 아그네스’ ‘딸에게 보내는 편지’ ‘마스터 클래스’ ‘햄릿’으로 관객을 불러 모았던 배우였고, 커피 CF의 “저도 알고 보면 부드러운 여자예요” 한 줄로 무대와 대중의 거리를 좁힌 사람이기도 했다. 그런데 윤석화를 떠올릴 때 후배들이 먼저 꺼내는 말은 대개 ‘주연’이나 ‘스타’가 아니다. ‘존경’이다. 윤석화는 왜 후배들에게 그런 이름으로 남았을까.

첫째, 윤석화는 ‘크게 보이는 자리’보다 ‘필요한 자리’를 택할 줄 알았다. 그는 “연극다울 것이라는 기대가 있다면 행인도 좋다”는 말을 남겼다. 겸손이 아니다. 그것은 작품을 먼저 두는 배우의 방식, 기준과 관련된 문제다. 무대에서 가장 흔하게 벌어지는 갈등은 배역의 크기, 순서, 조명이다. 윤석화는 그 경쟁의 규칙 자체를 비켜섰다.

그의 마지막 무대출연이었던 ‘토카타’의 5분 등장이 이를 상징한다. “내가 주인공이어야 한다”가 아니라 “지금 이 무대에 내가 필요한가”를 먼저 묻는 것이다. 후배들은 이 장면을 전설이 되어버린 특별출연으로 기억하기 전에, 배우라는 직업의 사명으로 기억한다. 선배가 먼저 자리를 비워줄 때, 후배는 눈치가 아니라 실력으로 무대에 설 수 있다.

둘째, 윤석화는 무대를 ‘정직한 약속’으로 대했다. 그는 무대를 “틀렸다고 다시 할 수 없고, 예쁜 것만 편집해 보일 수도 없는 곳”이라고 했다. 연기론이 아니라 직업 윤리에 가깝다. 관객 앞에서 한 번 숨을 내쉬면, 그 호흡까지 책임지는 직업이 배우라는 것. 후배들이 존경하는 선배는 대개 ‘잘하는 사람’이 아니라 ‘약속을 지키는 사람’이다.

21일 서울 종로구 한예극장 앞에서 열린 배우 고 윤석화의 노제가 끝나고, 고인의 영정이 이동하고 있다.   노제가 열린 한예극장의 전신인 정미소는 고인이 직접 운영했던 대학로 설치극장이다.        뉴시스

21일 서울 종로구 한예극장 앞에서 열린 배우 고 윤석화의 노제가 끝나고, 고인의 영정이 이동하고 있다. 노제가 열린 한예극장의 전신인 정미소는 고인이 직접 운영했던 대학로 설치극장이다. 뉴시스



공연계에서 약속은 시간만이 아니다. 컨디션 관리, 대사 준비, 동선 숙지, 상대 배우에 대한 배려, 마지막 커튼콜까지 이어지는 집중이다. 윤석화가 오래 신뢰를 쌓은 이유는 그 신뢰가 삶으로 증명됐기 때문이다. 약속을 지키는 배우에게 현장은 고개를 숙일 수밖에 없다.

셋째, 그는 후배들의 ‘자리’까지 만들었다. 2002년 대학로에 개관한 소극장 ‘정미소’는 그의 대표적인 유산이다. 배우가 배우로만 남지 않고, 다음 세대가 실험할 수 있는 공간을 마련했다는 점에서 의미가 크다.

연극판에서 공간은 곧 기회다. 작은 극장 하나가 신인 배우의 데뷔를 만들고, 젊은 연출가의 목소리를 내게 하고, 작가의 대본을 살아 움직이게 한다. 윤석화는 후배들의 설 자리를 만드는 일을 자기 일처럼 했고, 그 과정에서 운영의 고단함도 감수했다.

넷째, 그는 배우의 삶을 한 가지 길로만 규정하지 않았다. 윤석화는 연기뿐 아니라 제작·연출에도 손을 뻗었고, 공연예술 월간지 ‘객석’을 인수해 기록과 비평 생태계에도 힘을 보탰다. 뮤지컬 ‘토요일 밤의 열기’를 연출했고, 제작에 참여한 ‘톱 해트’는 영국 로렌스 올리비에상 수상으로 이어졌다.

한 사람이 여러 일을 했다는 나열이 아니다. “배우는 무대 위에서만 존재한다”는 좁은 관념을 깨뜨렸다는 뜻이다. 후배들은 이 궤적에서 ‘살아남는 법’을 배울 수 있었다. 더 정확히 말하면 ‘버티는 법’이 아니라, ‘다르게 기여하는 법’을 배웠다. 윤석화는 예술가가 생태계를 어떻게 떠받칠 수 있는지를 보여주었다.

다섯째, 그는 흔들린 순간에도 회피로 끝내지 않았다. 윤석화의 삶에도 굵은 굴곡이 있었다. 그럼에도 그는 무대로 돌아왔고, 작업으로 답했고, 후배들과 같은 현장에서 숨을 맞췄다. 사람들은 이런 과정을 오래 지켜보았다. 인간에 대한 존경은 시간이 만든다.

윤석화를 설명할 때 ‘스타’라는 단정은 너무 쉽고 가벼운 결론일지 모른다. 후배들이 기억하는 윤석화는 빛나는 순간보다 빛나게 버틴 시간이 더 아름다웠던 사람이다. 작품을 앞에 두는 방식, 관객과의 약속을 끝까지 지키는 직업성, 후배의 무대를 먼저 세줘주는 선배의 책임감.

그는 후배들에게 ‘잘하는 법’이 아니라 ‘어떻게 남는가’를 보여준 배우였을지 모른다. 분명한 것은, 그는 앞에 서는 것만이 아니라 비켜설 줄 아는 선배였다는 사실이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