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형모의音談패설]‘진짜마법이뭔지알아?’-아르헤리치내한공연

입력 2009-05-18 15:26: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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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르헤리치

피아노 앞에 한 여자가 앉아 있다. 검은 머리카락을 길게 길러 어깨 위로 늘어뜨린 그녀는 피아노 위로 몸을 잔뜩 웅크린 한 남자와 뭔가 이야기를 나누고 있다.
연인이라 보기엔 너무 진중하고, 모르는 사이라 하기엔 오가는 눈빛이 예사롭지 않다.
이들의 머리 위에는 육중한, 그리고 저 유명한 도이치그라모폰사의 노란 사각딱지가 지붕처럼 얹혀져 있다.

까까머리 학창시절, 이 음반의 커버를 참 좋아했다. 들여다보고 또 봐도 질리지가 않았다. 음반 한 장 사기에도 주머니가 빡빡하던 때라, 마음에 드는 음반 하나를 사면 고시생 영어사전 씹어 먹듯 듣고 또 들었다. 귀를 후비면 음표들이 우수수 귓밥처럼 떨어질 것 같던 시절이었다.

커버 속의 여인은 마르타 아르헤리치였고, 남자는 클라우디오 아바도였다. 연주곡목은 프로코피예프의 피아노협주곡 3번이었던 것 같다.
타오를 수 있는 데까지 타오르던 아르헤리치의 열정어린 피아니즘은 사춘기 남학생의 수줍은 가슴 속을 메스처럼 날카롭게 파헤쳤다. 어두운 방 안, 아버지 때부터 써오던 낡은 스피커에서 들려오던 프로코피예프는 내게 ‘세상은 살 만한 거야’라고 속삭이는 듯했다.

총알보다 빠른 게 세월이라던가. 어두운 방 안에서 오디오의 깜빡거리는 불빛에 눈부셔 하던 까까머리 학생은 어느덧 아침마다 머리에 염색 좀 하고 다니라는 아내의 핀잔을 듣는 나이가 되어 버렸다.

그런데 비밀이 하나 있다. 아르헤리치를 처음 듣던 날. 그날 밤 이후 까까머리 학생의 감성연령은 그만 정지되어 버렸다는 사실. 나이 마흔이 넘어서도 아르헤리치의 음악을 귀에 꽂는 순간만큼은 열다섯 그날 밤의 사내아이로 돌아갈 수 있게 되었다는 마법.

아르헤리치




지난해 아르헤리치의 내한 공연장을 찾은 중년의 사내는 ‘그래, 세상은 살 만한 거야’를 주문처럼 되뇌고 또 되뇌며 감격해 했다.
무대 위의 그녀는 검고 긴 머리칼 대신 제멋대로 뻗친 백발을 늘어뜨리고 있었고, 젊은 날의 날렵한 몸매는 눈 씻고 찾아보려도 찾을 수 없었다. 어두운 관객석에 앉아 그녀의 손가락 하나하나를 주시하고 있던 중년의 사내 역시 더 이상 그 때의 수줍은 소년은 아니었다.

하지만 마법은 이날 그녀와 사내를 25년 전의 밤으로 되돌려 보내는 신기를 보여주었다. 사내의 눈에 비친 그녀는 음반 속의 젊은 모습 그대로였고, 사내는 그녀의 피아노 앞에 앉아 그녀와 뜨거운 눈빛을 주고받던 아바도가 되었다.
그것은 진짜 마법이었다!

‘피아노의 여제’ 마르타 아르헤리치가 며칠 뒤면 다시 한 번 예술의전당 콘서트홀 무대에 선다. 차세대 거장을 예약해 놓은 피아니스트 임동혁, 그리고 최근 지휘계에 젊은 돌풍을 일으키고 있는 여성 지휘자 성시연과 함께이다. ‘트럼펫의 파가니니’라는 세르게이 나카리아코프도 내한했다.

아르헤리치를 만난다는 것은 젊은 날의 초상을 거울에 비추는 일이다. 그녀의 피아노를 들을 수 있다는 건 분명 이 세대의 축복이다.
이번 주말, 25년 전의 마법은 또 한 번 신기를 부릴 것이다. 비비디바비디 부.

5월24일(일) 8시|예술의전당 콘서트홀|문의 크레디아 02-318-4301
티켓 5만원~20만원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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