판소리, 팝, 뮤지컬 등 다양한 무대를 거침없이 소화해 온 이자람. 요즘은 연극 ‘프리마 파시’에서 홀로 극을 이끌며 새롭지 않지만 여전히 새로워야 할 질문을 관객에게 던지고 있다. 사진제공 | 쇼노트

판소리, 팝, 뮤지컬 등 다양한 무대를 거침없이 소화해 온 이자람. 요즘은 연극 ‘프리마 파시’에서 홀로 극을 이끌며 새롭지 않지만 여전히 새로워야 할 질문을 관객에게 던지고 있다. 사진제공 | 쇼노트




연극 ‘프리마 파시’는 호주 인권 변호사 출신 수지 밀러가 쓴 1인극으로 2019년 시드니에서 초연됐다. 이후 2022년 런던 웨스트엔드, 2023년 뉴욕 브로드웨이를 거치며 세계적인 명성을 얻었다.

이 작품이 갖고 있는 분위기와 메시지는 들기에 허리가 끊어질 듯 무겁다. 남성 성폭력 피고인을 주로 변호하던 형사 변호사 ‘테사’가 변호사 동료에게 성폭행을 당한 뒤 782일 동안 법정과 사회의 장벽에 맞서는 과정을 1인극 형식으로 끌고 간다.

테사의 인생은 하나의 사건으로 산산이 부서진다. 동료 변호사 줄리언과 술자리 이후 집으로 돌아온 테사는 예기치 못한 성폭력을 당한다. 법을 믿고 법으로 싸우던 사람은 이제 그 법의 절차와 증거주의 앞에서 무력해진다. “그날 나는 분명히 ‘아니’라고 말했는데, 법은 내 말보다 문자를, 내 눈물보다 사진을 원했다.”

테사는 신고를 하고, 진술을 반복하고, 조서를 고치며 스스로를 의심하게 된다. 하지만 멈출 수 없다. “이건 내 일이고, 내 싸움이다.” 그렇게 시작된 782일의 법정 싸움은 차츰 테사의 신념을 갉아먹어 들어간다. 한때 ‘모든 사람은 무죄추정의 원칙을 가진다’며 냉철하게 변호하던 그가, 이젠 피해자의 진술이 얼마나 쉽게 무시되는지를 몸으로 깨닫는다. 그리고 그 깨달음이 그를 다시 법정으로 불러낸다. 이제는 변호사가 아닌, 인간 테사로서.

제목 ‘프리마 파시’는 라틴어 법률 용어로 ‘그럴듯해 보이는 표면상의 진실’을 의미한다. 이 연극은 그럴듯해 보이는 ‘겉보기’를 의심하는 자리까지 관객을 데리고 간다. 현재 충무아트센터 중극장 블랙에서 한국 초연 중이다. 테사는 이자람, 김신록, 차지연이 돌아가며 맡고 있다.

이자람 캐스트로 이 작품을 만났다. 개인적으로 이자람의 무대를 여러 차례 경험했다. 뮤지컬 작품으로는 ‘서편제’의 송화인데, 그의 본업(?)이라 할 수 있는 판소리 완창무대를 본 적도 있다. 별것도 아닌 얘기를 엄청 재미나게, 그것도 어마어마하게 길게 늘여 이야기할 수 있는 예술가들이 판소리꾼이다. 이런 이유로 ‘판소리 완창무대를 소화할 수 있다면 못 할 연기도, 못 설 무대도 없다’는 나름의 지론을 갖고 있는데, 그 대표적인 인물이 이자람이라고 생각한다.





극 초반의 테사는 완벽한 ‘승소 기계’다. 이자람은 말의 속도를 올리고, 대사를 한 구절 한 구절 또렷하게 박아 넣어 재판장을 지배하는 변호사의 리듬을 만들어냈다. 관객은 “이제 증인은 내 거야”라고 자신하는 테사를 자연스럽게 받아들이게 된다.

하지만 ‘그날 사건’ 이후 모든 것이 달라진다. 테사의 목소리는 풍선의 바람처럼 서서히, 그러나 분명하게 힘을 잃어간다. 대사와 대사 간의 숨이 길어진다. 이 부분에서 이자람이 구사하는 정확한 언어의 타이밍을 실컷 볼 수 있는데, 확실히 판소리의 그림자가 어른거린다. 이자람의 ‘테사’는 ‘보는 재미’에 더해 ‘듣는 시간’까지 안겨준다.

2막에서 그는 울부짖지 않는다. 대신 배심원들이 빠져나간 공간을 향해 질문을 던진다. “누가 무엇을 증명해야 하는가.” 마지막 1분, 패배를 딛고 테사가 일어서는 장면이 차돌처럼 단단하게 다가온다. 관객의 박수는 컸지만 어딘지 낮게 가라앉아 있었다.

1인극인 만큼 무대는 단출하다. 비현실적으로 거대한 책상과 몇 개의 의자, 서류가 무대의 전부다. 이 책상 하나로 많은 장면을 만들어내는데 사무실, 법정, 집이 책상의 회전만으로 간단히 전환된다.

이 작품은 누가 더 크게 외치느냐의 싸움이 아니다. 이 연극의 무서운 점은 무엇을 듣고 무엇을 믿을지의 책임을 객석으로 넘긴다는 것이다. 신고율, 유죄율 같은 숫자는 중요하다. 그러나 이 연극이 묻는 말은 좀 더 단순하고 날카롭다. “우리는 무엇을 보고, 무엇을 외면했는가.”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