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로미오와 줄리엣’의 두 원수 가문인 캐퓰럿(왼쪽)과 몬테규. 두 가문을 붉은색과 푸른색으로 표현해 대립을 강조했다. 줄리엣은 캐퓰럿, 로미오는 몬테규 가문이다. 사진제공 |엠스텐
[스포츠동아 양형모 기자] 뮤지컬 ‘로미오와 줄리엣’ 무대를 아작아작 씹어 먹는 ‘두 개의 어금니’, 백주연과 김영주의 활약이 심상치 않다. 서울 서초동 한전아트센터에서 5월 31일까지 막을 올리는 이 예술적인 프랑스 뮤지컬에서 두 사람은 극의 뼈대를 받치는 든든한 두 기둥으로 서 있다.
붉은 피가 튀는 원수 집안의 안주인 레이디 캐퓰릿과 레이디 몬테규로 각각 분해 관객의 혼을 쏙 빼놓고 있다. 극초반 이들이 나란히 등장하는 테라스 장면은 관객의 오감을 순식간에 1300년대 이탈리아 베로나로 순간이동시킨다. 두 배우가 2층 테라스에 올라 서로를 향해 쏘아대는 핏빛 이중창은 보는 이의 눈과 귀가 뜨거워지는 명장면이다. 달착지근한 프랑스 향수냄새를 기대하고 앉은 관객들에게 폭발적인 성량과 뱃속까지 진동하는 바이브레이션으로 후끈한 카운터펀치를 날린다. 무대 위에서 두 여걸이 뿜어내는 기싸움을 보고 있으면 거대한 화산 두 개가 동시에 폭발하는 현장에 서 있는 기분이 든다.
붉은색 의상을 입고 가문의 열정을 대변하는 백주연은 레이디 캐퓰릿의 기구한 운명과 딸 줄리엣의 비극을 자신의 연기 그릇에 눌러 담았다. “나 역시 어릴 때는 꿈과 사랑, 희망을 품고 자랐지만 결국 시대의 사회적 가치관에 순응하며 스스로 선택할 수 있는 권리를 갖지 못한 채 살아온 인물”이라 고백하는 백주연의 레이디 캐퓰릿은 전쟁과 갈등이 멈추지 않는 세상에서 사랑만으론 삶을 지킬 수 없음을 뼈저리게 깨달은 어머니의 얼굴이다.


푸른색 의상을 입은 김영주는 레이디 몬테규의 끓어오르는 분노를 인정사정없이 객석을 향해 날린다. 그는 “내가 고민한 부분은 무게감”이라고 했다. “묵직한 차가움 속 투박한 부성애와 저 깊은 곳에 감춰진 몬테규 가문과 아들을 향한 뜨거운 모성애 사이의 밸런스를 잡으려고 노력했다”는 것. 어머니이자 가문의 든든한 기둥으로서 견뎌야 하는 양가적인 무게의 균형을 김영주는 노련한 저울질로 맞추고 있었다.
김영주의 레이디 몬테규는 오래된 옛날이야기 속에 머무는 캐릭터가 아니다. 지금 우리가 발을 딛고 있는 팍팍한 현실을 향해 날카로운 창끝을 겨눈다. “이 시대에 묻고 싶었다. 마지막 내 노래의 가사에 있듯 ‘전쟁의 끝은 아이들의 죽음. 무엇을 위해 우린 싸웠나’라고.”

‘레이디 몬테규’ 김영주(왼쪽)와 ‘레이디 캐퓰럿’ 백주연이 공연 막이 오르기 전 분장식에서 손하트를 만들고 있다. 사진출처 | 백주연 SNS

‘레이디 몬테규’ 김영주(왼쪽)와 ‘레이디 캐퓰럿’ 백주연. 사진출처 | 김영주 SNS
이들이 극과 무대를 자유로이 쥐락펴락할 수 있는 힘은 켜켜이 쌓은 연기 내공과 천부적인 재능, 갈고 닦은 개성에서 나온다. 1995년 데뷔한 백주연의 인생 캐릭터는 뭐니 뭐니 해도 뮤지컬 ‘삼총사’의 팜파탈 밀라디. 그는 다수의 시즌에서 밀라디를 맡아 자신만의 굵직한 전설을 썼다. 레이디 캐퓰릿에서도 그 전설의 흔적을 발견할 수 있다.
김영주 역시 독보적인 음색과 카리스마로 수많은 걸작 뮤지컬 작품에서 대체불가의 개성, 매력을 보여 온 배우다. 오래전부터 백주연, 김영주 둘은 카피할 수 없는 배우라고 여겨왔다. 재능, 노력, 시간, 돈을 쏟아부어 ‘백주연, 김영주보다’ 더 좋은 연기와 노래를 보여줄 수는(그래도 쉽지는 않을 테지만) 있을지 모르지만, ‘백주연과 김영주처럼’ 연기하고 노래할 수는 없을 것이다.
작품과 무대의 장면 장면을 잘근잘근 씹어 먹는 두 배우의 거대한 에너지를 온몸을 경험하고 싶다면 서둘러 극장으로 발걸음을 옮기시라. 핏빛 대립 속에서도 굳건하게 작품의 뼈대를 받치고 있는 두 동갑내기 찐친의 살벌하고도 황홀한 기싸움이 당신의 고막을 털기 위해 기다리고 있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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