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해금의 통곡, 비올라의 위로” 황홀했던 클래식고택의 밤 [양형모의 일일공프로젝트]

입력 2023-10-13 11:33: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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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지간히 속을 끓이던 비가 거짓말처럼 그쳤다.
어제까지만 해도 제법 쌀쌀했던 기온이 제자리로 돌아오고, 기분 좋을 만큼만 습기를 머금은 밤 공기가 설탕처럼 달큰해졌다.

덕분에 기다렸던 한옥에서의 쪽마루 음악회는 약속대로 문을 열어놓고는 관객을 기다리고 있었다. 주최 측에서 준비해 준 도시락(말도 못하게 맛있었던 것!)을 먹고 고택에 도착하니 벌써 객석은 부지런한 관객들로 빼곡하다.

비올리스트 김남중씨의 기획 공연시리즈 첫날(10월 4일).

연주자이자 공연기획자(정확히는 융복합공연예술기획자라고 한다)로도 맹활약 중인 김남중씨가 만든 무대로 ‘낮별에서 밤별로’라는 근사한 타이틀을 갖고 있다. 총 3회 공연의 시리즈인데, 첫날 공연의 부제는 ‘日月誠神(일월성신), 해와 달의 기도‘라고 했다.

장소는 오래된 한옥. 서촌 복합문화공간 클래식고택이다. 영화 ’건축학개론‘에서 의미있는 장소로 활용되기도 했던 이 곳은 주식회사 리한컬쳐가 인수해 한옥스테이이자 복합문화공간으로 탈바꿈 시킨 장소다. 이번 시리즈는 한국관광공사 전통한옥브랜드화지원사업의 일환으로 마련되었다고 한다.

공연 중 김남중씨의 소개가 있었지만 ’낮별에서 밤별로‘의 타이틀은 한국화 김선두 작가의 미술작품에서 영감을 받은 것이다.





양쪽으로 열고 닫는 여닫이문 두 개를 활짝 젖혀 놓으니 웃음이 날 정도로 소박한 무대가 모습을 드러냈다. 연주자들을 위한 보면대가 있고, 구석에는 특별할 것 없어 보이는 까만 업라이트 피아노가 한 대. 무대 양쪽으로 닫힌 미닫이 문이 무대와 연주자 대기공간을 멋들어지게 갈라놓고 있었다.

관객석은 마당에 줄 맞춰 깔아놓은 의자 30여 석이 전부. 옆 사람 무릎이 닿을 정도로 가까이 앉은 관객들의 눈이 따뜻해, 낮별 같다.

조명이 밝혀진 처마 위로 뻥 뚫린 하늘에는 언제 비가 왔을까 싶은 가을 밤이 익었다.

결과적으로 이날의 음악회는 상당히 만족스러웠다. 더할 것도 감할 것도 없이, 먹고 나서도 기분 좋을 만큼만 푼 밥 같다.

프로그램은 한 곡 한 곡이 모두 먹어본 듯, 처음 먹어보는 맛이다. 융복합공연예술기획자 김남중씨는 익숙함에서 익숙하지 않음을 우려내는 데에 탁월한 능력을 보여주었다.

이날 무대에 선 연주자는 모두 5명. 비올리스트 김남중씨와 해금 연주자 노은아 교수(서울대 국악과), 클래식 기타리스트 신주헌씨, 국악 타악기 연주자 서수복씨(국립국악단). 여기에 작곡가 김정근씨가 직접 피아노를 연주했다.

프로그램은 클래식, 국악을 중심으로 짜여졌는데 메인은 비올라와 해금이었다. 오랜 인연을 맺어오고 있다는 비올리스트와 해금 연주자는 낮별과 밤별처럼 어우러지며, 마치 모든 곡이 세계 초연처럼 들리도록 연주해냈다.

하이라이트는 아무래도 가장 기대하게 했던 지영희류 해금산조. 지난해 김남중씨가 자신의 독주회 ’Blooming‘에서 비올라로 연주해 음악계를 놀래켰던 곡이다. 이 독주회에서 비올라에게 자리를 내주었던 해금이 돌아오면서 곡이 또 한 번 새로운 얼굴을 드러냈다.


비올라와 해금이 카덴차를 연주하듯 솔로잉을 하는가 하면 어느새 담싹 서로의 소리를 움켜쥐며 한 목소리를 낸다. 비올라가 해금처럼 들리는가 하면, 해금에서 비올라의 중성적 기품이 우러나왔다.

비올라와 해금은 바흐의 비올라 협주곡 다단조 2악장에서도 뭉쳤다. 비올라와 해금의 바흐라니. 이날의 연주를 들었다면 바흐는 어떤 생각을 했을까.

해금과 비올라는 사실 찰현악기라는 점을 빼면 그린란드의 대륙빙하와 사하라 사막 만큼이나 공통점을 찾기 힘든 악기가 아닐까 싶다. 무엇보다 슬픔의 기로점에서 각자의 이정표를 갖고 있다.

해금의 슬픔은 거대하고 처절하다. 그의 울음은 이 자리에서 내장을 몽땅 토해놓는 것만 같다. 그렇게 한바탕 울고 나면, 더 울 수 없을 정도로 울고 나면 텅 비워져 버린 뱃속이 시원해진다. 우리 조상들은 그렇게, 해금처럼 울고, 울고나서 웃었다.

비올라도 운다. 그런데 해금과는 다르다. 눈물을 보이다가는 “아이고, 내가 귀한 분 앞에서 무슨 주책을 …”하며 주섬주섬 자리를 뜨는 귀부인 같다. 비올라의 소리는 슬픔조차 기품을 머금고 있다.

이날 연주가 그랬다. 해금이 한바탕 슬픔을 토하고나면 비올라가 위로하고, 비올라의 눈가에 눈물이 맺히면 해금이 손수건을 건넨다. 황홀한 조합이다.


좀 더 황홀해질 만한 소식이 있다.

비올라, 해금, 기타, 장고라는 이날의 기묘한 선물 같은 조합은 또 다른 모험과 도전의 시작이라는 얘기. 김남중씨는 이 조합으로 하나의 본격적인 팀을 꾸릴 생각인가 보다. 그리고 우리나라뿐만 아니라 세계 곳곳으로 음악적 여행을 떠나고 싶은 모양이다. 벌써부터 팀 이름을 놓고 고민 중이라는 얘기도 들린다.

쉼표 없이 무궁동처럼 고택을 울린 객석의 박수소리에 마지막 앙코르가 끝나고, 잔칫집 같았던 고택을 나서 돌아오는 길.

언뜻 어둔 하늘에서 별 하나를 보았던 것 같다.

밤별이겠지만, 낮별처럼 보이기도 했다. 하긴 밤별은 한때 낮별이었고, 낮별은 시간이 지나 밤별이 되는 것.

이 멤버들이 잘 되었으면 참 좋겠다. 이스탄불의 구시가지, 산토리니 섬의 흰 벽과 푸른 지붕 아래, 이탈리아의 작은 도시들, 북유럽의 중세 성당에서 듣는 이들의 음악은 어떤 별처럼 빛나게 될까.
돌아오는 밤의 공기가 음악처럼 달았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제공 | 리한컬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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