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성근 감독님이 신일고에 오셨던 게 1979-81년이었고, 나는 79-80년 있었죠. (68년 은퇴한 김 감독은 마산상고 지도자를 잠깐 지낸 뒤 기업은행-충암고를 거쳐 신일고에 부임했다. 이후 프로야구 출범을 맞아 82년 OB 코치로 영입됐다)
그때랑 지금이란 똑같으신 거 같아. 첫 인상이요? 학교에 부임하자 이불 보따리부터 싸가지고 들어왔다니까요. 집에 안 들어가셨지. 충암고 제자였던 조범현 KIA 감독에게 물어봐도 알 텐데 그 시절에도 노크를 하루에 몇 백개씩 받았어요. 체력 기른다고 언덕을 뛰어올라가게 했고요.
지금도 기억나는데 3학년 때 주전 못 뛰는 선수들은 타팀 경기장에 보냈어요. 정찰병이었지. 스코어북에 구질이나 결과를 적어오면 보시더라고. 그렇게 시킨 또 하나 이유는 꼭 선수가 아니라도 이런 일도 잡(job)이 될 수 있다고 보셨어요. 돌이켜보면 꼭 야구선수가 아니라도 나중에 사회에 나가 한 사람의 직업인으로 우리를 키우려고 하셨던 거지.
이 분 모시면서 느낀 철칙 1번이 약속이에요. 3학년 때 부산에서 열린 화랑기에서 우승했는데 감독님이 우승하면 해운대 가자고 공약을 걸었거든요. 그런데 학교 부장이 안 된다는 거야. 그래서 화가 난 감독님이 우리 서울 올라가는 날 새벽 6시에 해운대로 우리를 보내서 기어코 모래를 밟게 하더라고. 그때부터 윗사람과 잘 싸웠다고? 그랬죠, 그러니까 자꾸 짤렸지.(웃음)
한번은요, 내가 주장이던 3학년 때 동료 중 누군가가 사고를 쳐서 부원들이 이탈을 했어요. 어찌어찌 수습이 돼서 부원 전부가 다 모였는데 감독님이 “내가 교육을 잘못시켰다”면서 자기를 때리라는 거야. 그 순간 전원 다 “감독님 잘못했습니다”라고 무릎 꿇고 엉엉 울었지. 그 시절부터 카리스마가 있으셨죠. 감독님은 그때 지도자치곤 거의 때리지 않으셨는데도 그랬어요.
졸업한 뒤에도 명절 때 성수동 자택 가서 찾아뵙고 인연이 이어졌죠. 내가 고려대 졸업하고 처음엔 상업은행 가려 했는데 프로야구로 선회한 데에도 감독님 영향이 있었어요.
내가 SK 와서 인스트럭터로 초빙하기도 했고요. 조웅천 영입도 사실 감독님이 코치해준 거였고. 솔직히요, 우승을 떠나서 감독님처럼 야구에 열정을 갖춘 분이 비주류로 남아서 못 버티고 일본에 가셔야 되는 현실에 제자로서 화가 나기도 했어요. 2군 감독으로라도 영입하고 싶었고요. 그 분이 지나간 자리엔 선수가 남잖아요.
바깥에서 감독님하고 같이 지내기 어렵지 않느냐고 많이 묻던데 아마 감독님도 제가 제자여서 할 말 많이 참으실 거예요. 약속 지키고, 큰 요구만 들어주면 돼요. 커뮤니케이션을 해보면 들어줄 건 들어주시고, 설득할 때 하세요. 나나 신영철 사장님이나 감독님 하시고 싶은 대로 분위기 만들고 싶어요. 어차피 우승이란 목적은 현장이나 프런트나 하나잖아요.
김영준기자 gatzby@donga.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