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희기자가간다]“자세의틈?마음의틈이다보여…”

입력 2008-12-3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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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검도회연수원을가다
1995년 1월, 드라마 ‘모래시계’는 유난히 추웠던 그 해 겨울을 녹였다. 여주인공 혜린(고현정 분)의 곁을 지킨 보디가드 재희(이정재 분). 재희의 손에 항상 들려있던 것은 죽도(竹刀)였다. 사랑하는 여인을 위해 생을 마감하는 순간까지 놓지 않았던 죽도. 그 강렬한 장면 때문에 전국의 검도장은 때 아닌 호황을 누렸다. 기자도 그랬다. 치기 어린 겉멋이었지만 그 때는 이정재처럼 되고 싶었다. 키와 얼굴은 못 미치더라도 검도만큼은 재희를 능가할 수 있지 않을까. 하지만 검도는 만만하지 않았다. 한 달 동안 족법(足法)만 배우다, 호구한번 써보지 못한 채 죽도를 내려놓아야 했다. 그리고 10년 하고도, 4년의 시간이 흘렀다. 새해가 밝기 전에 ‘잃어버린 꿈’을 되찾기로 결심했다. 스승은 한국최고의 검도 고수들. 검도대표팀이 구슬땀을 흘리고 있는 충북 음성 대한검도회 중앙연수원을 찾았다. ○역사 공부부터 대학시절, 전국체전 우승경력을 가지고 있는 대한검도회 유점기 사무국장은 특이한 이력의 소유자다. 대학에서 물리학, 대학원에서 한문학을 전공한 뒤 정신문화연구원(현 한국학중앙연구원)에서 민족문학대백과사전 편찬에 참여한 학자출신. 하지만 죽도의 향기를 못 잊어 다시 검도계로 뛰어들었다. 유 국장은 음성으로 향하는 2시간 동안 검도자랑에 여념이 없었다. 덕분에 연수원에 도착하기 전부터 이론 공부가 시작됐다. 근대적인 검도가 시작된 곳은 일본. 하지만 한국은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검법을 보유하고 있는 나라다. 조선후기(1790년)에 간행된 무예훈련교범 ‘무예도보통지’에는 ‘본국세법’이 포함돼 있다. 본국세법은 신라시대의 검법으로, 실존하는 세계최고(最古)의 것. 한국 검도인들의 자부심은 바로 본국세법에서부터 비롯된다. 차분한 설명을 듣는 동안 어느새 음성에 닿았다. ○교검지애(交劍知愛) 대한검도회는 2009세계선수권을 대비해 국가대표 선수들을 월 1-2회 소집, 합동훈련을 펼치고 있다. 남자대표팀은 2006년, 대만에서 열린 제13회 세계검도선수권에서 우승을 차지하며 10차례나 준우승에 머문 한(恨)을 풀었다. 하지만 당시는 세계최강 일본이 4강에서 덜미를 잡혀, 결승에서 맞붙지 못한 아쉬움이 있었다. 대표팀은 일본을 꺾고, 명실상부한 세계최강이 되겠다는 결의가 대단했다. 고규철(66) 감독은 ‘범사(範師)’ 칭호를 받은 공인8단. 대부분의 고수들이 그렇듯, 고 감독 역시 푸근한 동네 할아버지의 인상이었다. 고 감독은 “검도는 부자지간, 사제지간에도 대련을 할 수 있는 유일한 무술”이라면서 “교검지애(交劍知愛)”를 역설했다. 칼을 주고받음으로써 서로를 사랑하게 된다는 역설이 호기심을 더 자극했다. “사제지간의 대결이요? 그럼, 제가 오늘 감독님과도 한 번 겨뤄볼 수 있는 건가요?” 고 감독이 은은한 미소를 띠고 답했다. “일본 무술의 본산지 교토에 갔을 때의 일이야. 여든이 넘어 보이는 노인이 도복을 어깨에 메고 검도장에 들어오더라고. 잠시 뒤 조용히 옷을 갈아입고, 그 노인이 나타났어. 자기 몸도 제대로 못 가누던 양반이 죽도를 들더니 딴 사람이 되더라고. 젊은이들도 쉽게 상대하지를 못했지.” 무모한 도전에 대한 고 감독의 ‘OK사인’ 이었다. ○검도는 예(禮)에서 시작, 예로 끝난다 도복을 입고, 검도장에 발을 디뎠다. 검도는 예에서 시작, 예로 끝난다. 국가와 도장, 스승과 동료, 그리고 칼에 대한 예를 배우는 것이 검도의 첫걸음. 입례(立禮)시에는 고개를 15-30도 정도 숙인다. 이 때 고개를 과도하게 숙이는 과도한 공손은 무인의 예에 어긋난다. 죽도는 오른손잡이든 왼손잡이든, 오른손이 앞으로 가게끔 잡는다. 순간적으로 힘을 낼 수 있도록 최대한 가볍게 잡고, 칼끝은 상대의 목을 향한다. 이것이 중단(中段), 즉 가운데 칼 자세다. 칼끝을 상대 다리 쪽에 겨누는 하단(下段)과 칼을 머리위로 들어올려 기본자세를 취하는 상단(上段)도 있지만 중단이 가장 보편적이다. ○기합소리만 국가 대표급 첫 번째로 배운 기술은 머리치기. 칼을 뒤로 뺏다가 상대 머리 높이로 내린다. 오른발은 앞을, 왼발은 뒤를 향하되 왼발의 뒤꿈치를 들어 몸이 앞으로 나가는 것을 용이하게 한다. 상대의 머리를 치는 순간에는 “머리!”라고 크게 외친다. 손목과 머리, 목 공격을 배운 뒤 한쪽 구석에서 계속된 연속공격연습. 도장의 가운데에서는 대표선수들이 죽도를 쉼 없이 휘두르고 있었다. 이들의 기합소리가 쩌렁쩌렁 울렸다. 눈을 잠시 감아보았다. 죽도가 한겨울의 찬 대기를 휘젓는 소리와 기합소리가 한데 엉켜 훈련의 강도를 짐작케 했다. 죽도가 바람을 가르는 소리는 내지 못하더라도 기합소리만큼은 지고 싶지 않았다. “머리! 허리! 손목!” 절규에 가까운 외침. “목소리는 대표선수감이야.” 고 감독의 처음이자 마지막 칭찬. 그제야 호구를 착용할 수 있었다. ○대련에서 배우는 효학반(斅學半)의 교훈 청팀과 백팀으로 나눠 대련이 시작됐다. 마지막은 고 감독과 초보검객의 승부. 나이차는 서른여덟. 요즘 한창 잘나간다는 영화 ‘과속스캔들’을 생각하면 손자뻘이다. “검도는 거리 감각이 핵심입니다.” 주장 장성홍(32·관악구청)의 이야기가 떠올랐다. 내가 공격하기 쉬우면서, 상대는 공격하기 어려운 거리를 잡아야 한다. 이렇게도 서보고, 저렇게도 서보고. 하지만 어느 거리든 고 감독의 죽도는 머리를 때렸다. “망설이지 말 것, 두려워하지 말 것.” 김태일(29·무안군청)의 조언도 무용지물. 손목을 한대 맞을 때 마다 따끔거리는 느낌이 온 몸에 퍼졌다. 두려워하지 않을 수 없다. 어느 동작을 취하든 상대를 읽는 고 감독은 마치 영화 ‘넥스트’에서 2분 뒤의 미래를 보는 니콜라스 케이지 같았다. 망설이지 않을 수 없다. 5분이 흘렀다. 죽도로 ‘죽도록’ 맞은 기자는 스승에게 예를 갖췄다. “제가 자세에 틈이 많았지요?”, “자세의 틈? 그것보다도 마음의 틈이 다 보였어. 그래서 대련을 하고나면 서로를 헤아릴 수 있는 법이지. 허허.” 고 감독은 “효학반(斅學半)”이라는 말을 가르쳐 주었다. “학업의 반은 남을 가르치면서 얻는 것”이기에 고 감독 역시 “오늘 배운 것이 많다”고 했다. 드라마 모래시계가 보여준 검도의 묘미란, 검도가 가진 그것의 딱 절반뿐. 연수원 한편에 붙은 “검은 몸으로 닦고 마음으로 베는 것”이라는 격언이 예사롭지 않게 보였다. 음성 | 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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