빠른 볼로 상대를 윽박지르는 파이어볼러는 벤치를 편안하게 해주지만, 기교파 투수는 벤치는 다소 불안해도 상대 타자를 요리할 줄 안다. 삼성 윤성환(왼쪽)과 장원삼은 기교파 투수가 큰 경기에서 강하다는 사실을 2012 한국시리즈에서 여실히 보여주며 팀의 우승을 이끌었다. 스포츠동아DB
기술피칭 윤성환-예술피칭 장원삼
SK 타선 요리…KS 우승 일등공신
껄끄러운 투수 임창용 대신 김진웅
2001년 KS 두산타선 매경기 대폭발
1개월 가깝게 펼쳐졌던 올해 포스트시즌의 열기가 삼성의 2년 연속 한국시리즈(KS) 우승으로 마감됐다. 해마다 포스트시즌이면 두드러지는 장면이 올해도 예외 없어 반복됐다. 마지막 가을잔치가 벌어질 때면 감독에게는 두 종류의 투수만 남게 된다. 감독을 편하게 해주는 투수와 감독의 인내심을 요구하는 투수다. 이도저도 아닌 투수는 엔트리에 들지도 못한다. 전자는 엄청 빠른 구속을 지닌 투수다. 강속구로 상대 타자를 쉽게 요리하면 벤치의 마음이 편안해진다. 모든 감독의 로망이다. 그러나 현실은 그렇지 못하다. 어떤 팀도 엔트리의 투수 모두가 시속 150km 이상의 강속구를 던질 수는 없다. 또 그래봐야 팀에 도움이 되지 않는다. 비슷한 유형의 투수만 있으면 상대 타자들이 쉽게 적응한다.
○감독의 인내를 요하는 투수
감독이 참아야 하는 투수는 기교파다. 공은 빠르지 않지만, 컨트롤이 좋고 상대 타자의 타이밍을 빼앗는 기술로 버텨나간다. 이런 투수들은 안타도 많이 맞는다. 주자가 많이 모이지만, 결정적 한 방을 맞지 않고 잘 버틴다. 2000년 가을 두산의 조계현이 대표적이었다.
스피드가 떨어지는 투수가 마운드에 오르면 감독은 불안하다. ‘혹시 큰 것을 맞지 않을까’ 걱정하면서 피칭을 바라본다. 조바심이 나지만 큰 경기에선 이런 투수들이 상대 타선을 잘 요리한다. 삼성 윤성환은 올해 SK와의 KS 1·5차전에서 기술피칭을 잘 보여줬다. 정교한 컨트롤과 무브먼트, 직구를 더욱 빨라보이게 만드는 커브로 SK 타선을 요리했다. 장원삼도 그랬다. 2·6차전에서 보여준 컨트롤은 절묘했다. 타자마다 던져야 할 결정구를 미리 정해놓고, 거꾸로 상황을 만들어가는 피칭은 예술이었다. 피칭은 몸이 아닌 머리로 한다는 것을 실감시켰다.
감독이 참아야 하는 투수는 또 있다. 컨트롤은 들쭉날쭉하지만 상대 타선이 치지 못하는 투수다. 해태시절 김정수를 꼽을 수 있다. 1987년 삼성과의 KS 2차전에서 4구 8개를 내주고도 7.1이닝 동안 4안타 1실점으로 승리투수가 됐다. 주자가 계속 걸어나가자 해태 김응룡 감독은 좌불안석이었지만, 삼성 타자들도 야생마 같은 공에 제대로 배팅 포인트를 잡지 못했다. 1982년 프로야구 원년 KS 1차전에 선발로 나선 OB 잠수함투수 강철원은 삼성에 10개의 4사구를 허용하고도 9이닝 동안 3실점으로 역투했다. 중요한 것은 벤치의 감독이 아니라 상대 타자다. 감독의 마음이 편안한다고 해서 경기를 이기지는 못한다. 어떤 방식으로든 투수가 상대 타자를 막아야 이긴다.
○타자의 입맛에 맞는 투수, 치기 껄끄러운 투수
2001년 삼성과의 KS에서 난타전 끝에 우승한 두산 김인식 감독. 11년 전 성공 이유를 한마디로 정리했다. “상대에서 우리 타자들의 입맛에 맞는 투수들만 내줬다.” 당시 두산 타자들은 삼성 임창용을 가장 껄끄러운 투수로 여겼다. 불같은 강속구는 사라졌지만, 김동주 우즈 심재학 등 주축 타자들이 임창용의 공을 부담스러워 했다. 그러나 삼성 김응룡 감독은 소방수 김진웅의 스피드를 더 믿었다. 고비마다 김진웅이 등판했고, 두산은 신나는 타격잔치를 벌였다. 4차전에서 삼성이 2회초 8득점했지만, 두산은 3회말 12점을 뽑아 대역전승을 거뒀다. 올해 KS에서도 삼성은 3번이나 한 이닝에 6점을 뽑았다. 2·6차전은 이겼고 3차전은 졌다. 불펜투수의 등판순서도 비슷했고 상대하는 타선도 달라진 것이 없었지만, 결과는 정반대였다. 그래서 감독 자리가 어렵다. 투수진 운용에 정답이 없기 때문이다. 조범현 스포츠동아 해설위원은 이런 결과를 두고 ‘상대 선수와의 궁합’이라는 말을 썼다. 서로 다른 환경의 남녀가 만나 잘 살면 궁합이 좋은 것이고, 결과가 나쁘면 궁합이 맞지 않다고 한다. 궁합. 투수와 타자의 오묘한 관계를 가장 잘 표현한 단어가 아닐까.
전문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kimjongkeon