잔인한 4월을 보낸 슬로스타터들이 5월 기지개를 펴고 있다. 넥센 박병호, 두산 김현수, 롯데 송승준(왼쪽부터) 등 프로야구 ‘슬로스타터’들의 야구는 이제 시작이다. 사진|스포츠동아DB·스포츠코리아
넥센 박병호 5월 5경기서 4홈런 7타점
두산 김현수·삼성 최형우도 달아올라
4월 내내 고전한 롯데 송승준 첫승 신고
“기다리면 살아난다” 확고한 믿음 중요
5월이 왔다. 프로야구의 슬로 스타터(Slow Starter)들이 기지개를 켜는 시간이다. 슬로 스타터는 말 그대로 출발이 늦은 선수, 혹은 궤도에 진입할 때까지 어느 정도 시간이 걸리는 선수를 뜻한다. 그러나 결코 나쁜 의미는 아니다. 야구 관계자들은 “슬로 스타터는 기본적으로 ‘잘 하는 선수’에게만 쓸 수 있는 단어”라고 입을 모은다. 시작은 미약해도 끝은 남들보다 창대한 선수들에게 붙는 별명이다. 슬로 스타터들이 하나둘씩 살아나는 순간, 프로야구 판도에 큰 소용돌이가 몰아치는 이유이기도 하다.
● 따뜻한 5월을 기다렸던 대표적 슬로 스타터들
넥센 박병호가 슬로 스타터의 좋은 예다. 박병호는 지난 2년간 4월 성적이 부진했지만, 5월부터 몰아치기를 시작하면서 결국 두 시즌 모두 정규시즌 최우수선수(MVP)에 올랐다. 올해도 다르지 않다. 4월 한 달 간 6홈런·11타점을 기록했던 그는 5월에 치른 5경기(7일까지)에서 벌써 5홈런·9타점을 기록하고 있다. 두산 김현수나 삼성 최형우 같은 간판타자들도 마찬가지다. 시즌 초반 더딘 페이스로 애를 태웠지만, 어느새 약속이나 한 듯 자신의 타격감을 회복해가고 있다.
투수들도 다르지 않다. 대표적인 슬로 스타터 가운데 한 명인 롯데 송승준은 4월 한 달 간 고전하다가 5월의 첫 등판인 3일 문학 SK전에서 마침내 시즌 첫 승(5.2이닝 1실점)을 신고했다. 한화 외국인투수 앤드류 앨버스도 6일 잠실 LG전에서 국내 데뷔 후 처음으로 100구를 넘게 던지면서 6이닝 1실점으로 최고의 투구를 했다. 앨버스는 스프링캠프 때부터 스스로를 슬로 스타터라고 설명하곤 했다.
● 왕년의 ‘홈런왕’ 장종훈 “나도 5월부터 몰아친 스타일”
경험자의 생생한 증언도 있다. 역대 최고의 홈런타자 가운데 한 명이었던 한화 장종훈 타격코치다. 프로 통산 340홈런을 때려낸 장 코치는 1991년과 1992년 프로야구 MVP 출신이고, 골든글러브만 무려 다섯 번이나 수상했다. 그런 장 코치도 현역 시절 슬로 스타터로 유명했다. 장 코치는 “나도 4월에는 좀 힘겨워 하다가 5월부터 몰아쳤던 스타일이다. 박병호 같은 선수의 마음을 잘 안다”며 “시즌 준비를 미흡하게 한 것도 아닌데 4월에 잘 안 풀리는 일이 종종 생기곤 했다”고 귀띔했다.
초반 페이스가 더딘 이유는 선수마다, 그리고 시즌마다 다르다. 장 코치는 가장 대표적인 이유로 다소 쌀쌀한 3∼4월 날씨와 지나친 의욕을 꼽았다. “확실히 날이 따뜻해지면 몸이 풀리기 마련이다. 따뜻한 날이 몸에 더 잘 맞는 선수들이 분명히 있다”며 “잘 하려고 페이스를 한번에 끌어올리기 보다는 한 경기, 한 경기 치르면서 그만큼씩 내 몸에 맞는 밸런스가 쌓이면 내 타격을 할 수 있게 된다”고 설명했다.
● 슬로 스타터에게 필요한 것? “자기 스스로와 팀의 믿음”
더딘 페이스에 심리적으로 쫓기지 않고 더 멀리 보는 선수가 자신과의 싸움에서 이긴다. 결국 필요한 건 자신감이다. 한화 정민철 투수코치는 “예전에 우즈, 호세, 데이비스처럼 훌륭한 용병 타자들도 4월의 스윙과 5월의 스윙이 확연히 달랐다”고 예를 들면서 “정신은 몸을 지배하기 마련이다. 슬로 스타터들은 기본적으로 늘 본인이 생각했던 만큼 이루는 사람들이니, 잠시 부진하더라도 심적으로 서둘지 않는 선수들이 결국 제 페이스를 찾게 된다”고 설명했다. 장 코치 역시 “시즌 준비가 잘 돼 있다는 믿음이 있다면 초반에 조금 부진하다고 해도 흔들리지 않을 수 있다”며 “대부분 야구를 잘 하는 선수들이라 팀도 그 선수들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다. 차분히 기다려줄 수 있는 팀의 배려가 뒷받침된다면 언제든 살아나게 된다”고 신뢰를 표현했다.
배영은 기자 yeb@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goodgoe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