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까댐의 영화 까대기] 영화 ‘늑대소년’…‘사랑’과 ‘사육’ 사이!

입력 2012-11-02 15: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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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랑’과 ‘사육’ 사이!
(스포일러 주의!)

지금으로 부터 47년 전이라는 시간적 배경을 무대 삼아,
폐병을 앓아 시골로 요양 온 소녀(박보영)와 그녀의 가족(엄마(장영남), 여동생(김향기) 그리고 그 집 헛간에 버려진 늑대소년(송중기)이 만나며 벌어지는 기묘한 해프닝을 담고 있는 이 영화는!

흥미로운, 두 가지 상반된 입장으로 진행 되는데,
하나는, 소녀를 사랑한 늑대의 입장.
또 하나는, 늑대를 사육한 소녀의 입장이 그것이다.

그럼 먼저, 소녀를 사랑한 늑대의 입장이다.

그(송중기)는 47년 전, 그러니까 현재의 할머니가 소녀였던 시절.
군에서 적진에 침투하기 용이한 도구를 만들기 위해 키운 일종의 실험용 ‘늑대쥐’였다.

그런데 실험 전담자가 소리 소문 없이 죽게 되자, 그저 홀로 방치 된 채 굶주리다, 새로 이사 온 가족의 식사대용(감자)으로 허기를 채운 것을 계기로 그들의 ‘늑대견’으로 입양 된다.
그런데 하필 그 댁의 첫째 딸(박보영)에게 첫눈에 반한 나머지 이제까지의 모든 과거를 묻어두고 그는, ‘늑대소년’으로 살기를 갈구하고 그로인해 그녀가 원하고 시키는 것이라면 사족을 못 쓰고 행하던 중, 소녀를 탐내 별장을 사준 아.친.아(아빠 친구 아들)의 더티한 ‘견’제 때문에 순간적으로 이성을 잃고 그냥 덜 인간다운 ‘늑대크로마뇽인’으로 변신해 녀석의 목을 살짝 깨물어 준다는 것이 그만 녀석을 죽음에까지 이르게 하고, 그것이 어디까지나 화에 취해 벌어진 고의 없는 사고였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졸지에 군에 쫓기는 동시에 소녀에게까지 잠시(?)(47년 동안) 이별을 통보 당하는 애처로운 ‘늑대새’ 신세로 전락하게 됐지만 그녀가 정성스레 남기고 간 손 편지를 받은 만큼 그 어떤 시련과 고난이 닥쳐와도 기필코 소녀를 기다리고야말겠다는 ‘단순‘새’뇌’적 입장이다.


다음은 늑대를 사육한 소녀의 입장이다.

그녀는 전형적인 차도녀다.
아버지가 돌아가시며 급격히 가세가 기울고 폐병에 걸려 시골로 요양 온 신세지만 그녀 특유의 도도함과 도시적 깍쟁이 기질은 무너져가는 전원주택에서도 꼿꼿이 유지된다.

그런 그녀에게, ‘요’ 늑대견이 나타난다.
처음엔 헐벗고 굶주린 데다 몹시 더럽기까지 한 그에게 질색적인 거부반응을 보이던 그녀는 자신의 한 끼 양식을 지키기 위한 본능적 방어의 수단으로, 또 잘 씻겨 놓고 보니 외모도 나쁘지 않은(그가 무려 송중기 이므로) 관계로 ‘사육 교본’을 토대로 세상 어디에도 없는 ‘차칸늑대’ 길들이기에 돌입한다.

그리고 그녀는 ‘기다려’ 한마디로, 그를 나만의 충성스런 ‘늑대펫’ 만들기에 성공하고 머리 쓰다듬기 간식 챙겨주기 및 기본 숙식제공 같은 간소한 아량을 빌미로 날아오는 철근 막기, 하루 종일 자신과 놀아주기(여기엔 여장도 포함되어 있다), 집적대는 아.친.아와 동네 양아치로부터 보디가드 해주기 등 외진 촌 동네임을 감안한다면 나름 최고 난이도인 문제들을 그로 하여금 헐값에 해결하기 시작한다.

그런데 그 과정에서 치명적인 문제가 하나 발발하였으니,
이것이 화만 났다하면 지 승질을 주체하지 못하고, 흉칙한 털복숭이 ‘늑대괴수’로 변태해 감히 자신과 같은 종의 인류를 이빨로 물어뜯어 죽이는 것이 아닌가?!

그 순간! 한낱 어리디 어린(이에 낀 고춧가루만 봐도 남친이 싫어진다는 시절의) 소녀는! 그 행위가 자신을 방어하기 위함이란 전제임을 까맣게 잊고도 남을 만한 경기어린 징그러움에 휩싸인 나머지 이제껏 그에게 취한 부단한 신세와 촉촉이 쌓아올린 애잔한 감정들을 죄다 망각함과 동시에 혹시 내가 이 괴물에게 ‘책잡힌 일은 없나?’란 간사한 물음과 함께, 혹시나 있을지 모를 후환에 대한 불안과 두려움에 떨기 시작한 찰나! 그를 잡으러 왔지만 그의 존재가 세상에 알려지는 것이 두려운 나머지 그저 덮어 두고 조용히 떠나려는 군인들을 핑계 삼아, 딱히 병이 낫지도 않은 상태에서, 또 그들의 어떠한 추가적 위협도 없는 상황에서 서둘러 그를 나 몰라라 유기하고, 그냥 떠나기 뭐해 ‘설마 말도 못하는 것이 글을 읽겠냐?’며 대충 휘갈겨 쓴 쪽지 한 장 달랑 남겨 놓고, 영영 이주하며 어디까지나 ‘난 사람, 넌 짐승’ 정신에 기인한 새마음 새뜻의 독립적 사생활을 영위해가기로 다짐한 ‘냉혈차도녀’적 입장이다.


그리고 이 서로 다른 두 종의 문화적 오해(?)에서 비롯된 심각한 입장 차는, 이 시간 개념 없는 ‘늑대학생’이 47년이란 세월을 글과 말을 익히며 소녀를 기다리는데 허비하고, 결국 머리가 하얗게 샌 소녀와 다시금 재회하는 장면에서 끝장을 보는데!

전원주택에 대한 전화를 받고 찾아온 ‘노파소녀’는 과거 자신이 남긴 쪽지 속 한마디(“기다려 나 다시 돌아올게”) 때문에 지난 47년 간 피나는 노력으로 한글을 깨우치고 으르릉만 댈 수 있었던 개발음을 뼈다귀 물고 침 질질 흘려가며 교정해 마침내 어엿한 강남 스타일로 완성 시킨 그에게 ‘너 정말 부담되게 왜이래’식의 가식적 눈물을 선보이며 형식적으로 하룻밤 묵은 뒤, 뒤에선 손녀에게 ‘돈 없고 착하기만 한 녀석은 적당히 데리고 놀다 차버리라’는 현실적 교훈을 설파하며, 재차 그를 버리고 현실이란 냉정의 도시로 떠나간다.

그런데 이 배알도 없는 자식이 이 상황에서 한다는 짓이, 소녀가 어린 시절 지나가는 식으로(마치 ‘언제 한번 밥이나 먹자’ 같은) 내뱉었던 눈사람 드립에 낚여 차디찬 언덕배기에서 눈을 뭉텅이로 굴리며 자신을 또 한 번 버리고 가는 그녀의 차창을 향해 있는 꼬리 없는 꼬리 휘저으며 재롱을 피우고 앉아 있으니 이 대책 없고 눈치도 없고 시간 개념도 없는 외골수 잡종늑대에게 뭐라고 충고를 해주어야 할지 그리고 이것을 어느 작은 산골 소년과 소녀의 지고지순한 순애보로 그리고자 했던 감독이나 그를 믿고 연기한 배우들(송중기와 박보영의 연기는 두말할 나위 없이 좋았다!)에겐 또 뭐라고 위로를 전해야 할지 참 난감하기 짝이 없다.

결론적으로! 이 영화의 흥행적 비극은 이 두 입장이 대립되며 나타나는 차이의 지점!
즉, 제작진이 의도하고자한 순애보적 ‘사랑’을 ‘사육’으로 밖에 받아들이지 못 할지 모를, 다분히 나 같은 ‘견’해의 관객들과의 대조적 입장 혹은 정서 차이에서 판가름 나게 될 것이라는, 한 떨기 슬픈 동화 같은 까댐 되시겠다! --;

사진|늑대소년 공식사이트
글|영화평론가 까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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