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구율화의 The, Fan] 여성 야구팬으로 산다는 것

입력 2010-12-11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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야구팬, 그것도 여성 야구팬, 심지어 한화 이글스의 팬, 하물며 20년 경력의 독종팬….

나를 규정하는 여러 가지 단어 중에, 내 정체성을 가장 잘 드러내는 것들이다. 20년 전에 나를 알던 사람도, 지금 현재 나를 아는 사람도, 한결같이 나를 야구팬 또는 한화팬으로 기억하니 말이다. 아마 오랜 시간이 흐르는 동안 내게 있어 변하지 않은 단 한가지를 꼽는다면, 바로 야구사랑이리라.

돌이켜보면, 내 삶의 갈피갈피 어느 구석을 돌아보아도 항상 야구가 존재한다. 학창시절에는 프로야구 중계방송의 캐스터가 되는 것이 꿈이었고, 1999년에 이글스가 창단 후 처음으로 우승하던 순간, 잠실야구장의 3루 관중석 한 편에서 펑펑 울면서 사법시험 준비를 결심했다. 사법연수원 입소식날에 “내 장래희망은 한국시리즈 7차전의 시구자가 되는 것이다” 라고 자기 소개를 한 덕분에, 지금도 몇몇 동기들은 우리 아버지가 야구단을 운영하시는 줄로 알고 있다. 하기사, 비록 집안에 야구 관계자는 없지만 아버지부터 어린 조카까지 삼대가 빠짐없이 극성팬이니…. 이만하면 야구는 내게 있어 취미의 영역을 넘어섰다고 해도 과언이 아닐 것이다.

내 팬심이 너무 극성맞은 탓일까, 아니면 우리 이글스의 최근 성적이 그다지 아름답지 못해서일까. 사람들은 종종 내게 “야구가 밥 먹여주냐”며 안쓰러운 눈길을 보내곤 한다. 글쎄, 난들 왜 본전 생각이 나지 않으랴. 야구 볼 시간에 틈틈이 영어 단어를 외웠더라면 외국인 공포증은 생기지 않았겠지. 하다못해 헛일삼아 인형 눈알을 달았더라도 아파트 한 채는 장만했을텐데. 아니지, 가슴 졸이고 눈물 흘리고 마음 한자리 편할 날 없었던 그 숱한 밤들을 생각하면, 내가 전생에 무슨 죄를 그리 많이 지었나 싶어 한숨이 저절로 나온다.

그렇게 힘들면 그만두면 되지 않느냐고? 모르시는 말씀. 팀을 응원하는 야구팬의 심정이란 취향이나 기호의 문제와 확연히 다르다. 굳이 표현하자면 시험장 문앞에서 자식을 기다리는 부모의 그것과 같다고나 할까. 부디 훌륭히 싸워 이기고 돌아오기를 바라고 또 바라며 교문에 엿붙이고 있는 그 간절한 마음. 행여 싸움에서 패배하고 고개를 떨구며 나오는 날에는, 세상 그 누구보다도 먼저 달려가 손을 맞잡고 등을 두드려 주고 싶은 심정. 가끔은 내 마음도 고단하고 속상해서 모진 말이 나오려 하지만, 네 속은 또 어떠랴 싶어 꾹 참게 되는 그 애잔함이란. 그러니 어찌 내가 먼저 그 문앞에서 돌아설 수 있으랴. 자신의 인생을 걸고 시시각각 힘겹게 싸우는 선수들이 있는데….

아마도 선수들은 이런 내 마음을 알지 못할 것이라 생각하니, 어쩌자고 이렇게 지독한 짝사랑을 하고 있나 싶어 허무해지기도 한다. 하지만, 세상에서 가장 숭고한 사랑은 짝사랑인 법. 행복한 순간이면 함께 하고 싶고, 슬프고 무거운 짐은 나누어 지고 싶은 존재가 나의 선수, 나의 팀, 나의 야구다. 어느 춥고 배고픈 저녁 나절, 옷깃을 여미며 종종걸음을 치다가도, 문득 떠올리며 입꼬리를 살짝 올리게 되는 그런 사랑. 준만큼 온전히 되돌려 받지 못하는 걸 알면서도 외사랑을 멈추지 못하고 있으니, 어쩌면 세상에서 가장 독하고 끈끈한 심성을 가진 사람들. 바로 그들이 The Fan이다.변호사.

야구선수들의 인권 보장을 위한 법과 제도 마련에 관심이 많다. 야구계 변방에서 꾸준히 팬의 목소리를 내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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