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지혜 월드투어, “전설이 시작됐다”

입력 2016-05-17 17:28: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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꽤 흥분했었는지도 모르겠다. 지난 12일 서울 세종문화회관 대극장에서 열린 바이올리니스트 박지혜(31)의 공연을 보았다. 월드투어라 명명된 이날의 공연은 말 그대로 세계를 향해 떠나는 기나긴 연주여정의 출발점. 청호나이스(회장 정휘동)가 후원해 원대한 박지혜의 또 다른 출발에 의미를 더했다.

공연을 보고 집으로 돌아가는 길에 짧다면 짧고 길다면 긴 문장을 SNS에 올렸다. 감상의 ‘평’이라기보다는 ‘느낌’에 가까웠다. 사실은 경악과 탄식의 경계선을 오락가락한 기분이었을 것이다. 서두에 밝혔듯이 꽤 흥분해 있었고, 문장은 어수선했다.

박지혜는 이날 연주회를 정확히 이등분해 프로그램을 짰다. 1부는 클래식 레퍼토리, 2부는 록밴드와 협연한 비발디의 ‘사계’가 메인이었다.
박지혜는 본래 클래식 아티스트이다. 클래식을 전공한 후 퓨전, 크로스오버로 전향한 것이 아니라 원래 클래식 바이올리니스트이고 지금도 그렇다. 그러니까 박지혜는 대중음악을 연주하는 클래식 연주자가 아니라, 클래식을 대중적으로 연주하는 클래식 연주자인 것이다. 이 점을 분명히 해두면 박지혜의 음악을 이해하기가 한결 편해진다.

박지혜는 이날 공연의 문을 베토벤의 바이올린소나타 24번 ‘봄’의 1악장으로 열었다. 요즘 계절에 어울리는 선곡이기도 하지만 정통 클래식 바이올리니스트로서의 정체성을 관객에게 전달하기 위한 전진배치로 볼 수도 있겠다. “조금 있으면 깜짝 놀라실 걸요?”하는 박지혜의 짓궂은 미소를 보는 것만 같다.

몬티의 ‘차르다스’와 생상의 ‘죽음의 무도’. 이어 박지혜의 트레이드마크와 같은 곡인 ‘지혜 아리랑’이 연주됐다. 박지혜 본인이 직접 편곡한 지혜 아리랑은 곧이어 연주한 ‘지상에서 가장 슬픈 음악’으로 불리는 비탈리의 ‘샤콘느’와 대비될 만하다. 부제를 붙인다면 ‘지상에서 가장 화려한 아리랑’쯤이 어떨까 싶다.


● 눈앞에 그려지는 듯한 황홀한 사계

2부는 비발디의 사계. 한국인이 가장 사랑하는 클래식 리스트에서 부동의 1위를 지키고 있는 작품이다. 5인조 록밴드와 협연한 비발디의 사계 연주는 굉장한 퍼포먼스였다. 소리가 만들어내는 그림이 워낙 풍부해 사계절을 마음껏 즐길 수 있었다. 거대한 백스크린을 배경으로 적극 활용한 것도 ‘신의 한 수’였다.

록밴드는 록을 연주했다기보다는 오케스트라의 역할에 충실한 연주를 들려주었다. 박지혜 역시 록밴드의 멤버가 아닌, 협연자로서 연주했다. 다섯 명의 록밴드는 오케스트라와는 다른 색다른 맛의 반주를 선보였다. 즉 이날의 사계는 클래식과 록의 만남이라기보다는 클래식과 록이 창출해낸 박지혜식의 ‘제3의 장르’라는 느낌이 강했다.



바이올린에 장착한 마이크를 통해 증폭된 음량과 박지혜의 화려한 연주 퍼포먼스에 눈과 귀를 빼앗기지 않았다면, 의외로 박지혜의 연주가 감정이 과잉되지 않은 절제되고 치밀하게 계산된 연주라는 사실을 발견할 수 있었을지 모른다. 지금까지 나온 박지혜의 앨범을 들어본 사람이라면 수긍할 수 있을 것이다. 박지혜는 감정보다는 오히려 이성과 절제에 뛰어난 연주자일지도. 박지혜가 클래식 바이올리니스트라는 사실을 새삼 상기하게 만든다.

박지혜는 헨델의 ‘사라방드’를 마지막 곡으로 골랐다. 연주에 앞서 박지혜는 “내 인생과 가장 닮아 애착을 갖고 있는 곡”이라고 설명했다. 어둡고, 느리고, 진중하게 시작한 연주는 이내 전환점을 맞아 더없이 강렬하고 화려하게 비상해서는 극적으로 마무리되었다.

이토록 황홀한 무대가 월드투어라는 이름을 걸고 세계로 나아간다니 관객의 한 사람으로서 마음이 설렌다. 집으로 돌아오는 내내 사라방드가 귀에서 무궁동(처음부터 끝까지 같은 길이와 빠르기의 음표로 진행되는 기악곡 또는 그 악장. 선율이 반복되어 영구운동같은 느낌을 줌)처럼 되풀이되어 울렸다.

헨델의 사라방드는 이날 무대에서 화려하게 마무리되었지만, 박지혜의 사라방드는 여전히 연주되고 있고, 앞으로도 연주될 것이기 때문이다. 인생을 빼닮았다는 그녀의 사라방드는 아직 마지막 마디가 작곡되지 않았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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