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스포츠현장]태릉선수촌‘불암산종주’도전

입력 2008-04-0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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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전설 조선의 도읍을 정할 때였다. 한양에 남산이 없어 수도가 되지 못한다는 소문이 퍼졌다. 금강산의 한 줄기가 서둘러 발걸음을 옮겼다. 하지만 간발의 차로 남산이 정해졌다. 실망한 산은 그 자리에 주저앉아 버렸다. 그게 불암산이다. 불암산의 형세는 남산을 등지고 있는 모습이다. 태초부터 한(恨)이 서려있었다. 600여년 후, 땀과 눈물을 업으로 하는 사람들이 산자락에 모여들었다. 사점(dead point)에 이르는 고통을 감내하며 심장과 폐, 그리고 꿈을 키웠다. ○D-1일 핸드볼협회와 홈플러스가 후원 조인식을 맺는 자리. 1988년 서울올림픽 여자핸드볼 금메달리스트 이미영은 당시 감독이었던 고병훈 핸드볼협회 사무국장을 제대로 쳐다보지 못했다. “아직도 카리스마가 장난 아니시네요.” 지옥훈련에 대해 물었다. “불암산 종주가 너무 힘들었어요. 매주 단 1초라도 기록을 줄이지 못하면 후폭풍이 불었죠. 태릉에 가시면 톱밥길이라고 있어요. 모래사장처럼 푹푹 발이 빠지는. 그곳에서 나머지 공부를 했어요.” 이 타이밍이다. “저도 내일 한번 해 보려고요.” “네? 기자시라면서요.” ○30분 먼저 출발 어차피 최종 순위는 뻔하다. 왕복 8km면 선수들은 페이스 조절을 할 것이다. 스타트 후 전력질주. 30m 정도는 앞서 갈 수 있을 지도 모른다. 하지만 내 몸을 훑어 본 태릉선수촌 최경택 체력담당 지도위원은 “큰 일 날 수 있다”면서 “먼저 천천히 출발하시라”고 일렀다. 오후 1시 반. 각 종목 임원들이 코스 사이로 배치된다. 심폐지구력의 한계를 시험하는 장. 혹시 모를 불상사에 대비하기 위함이다. “한 가지 이유가 더 있다”고 했다. 정상에 이르는 길은 여러 갈래가 있다. 자칫 잘못 들어섰다가는 길을 잃기 십상이다. 오후 2시, 멀리서 익숙한 얼굴이 보인다. 남자 핸드볼 수문장 강일구. “근육통 때문에 저도 오늘 30분 먼저 출발입니다.” 반가운 동지를 얻었다. ○나도 대표선수? 하키장 트랙을 돈다. 400m. 우레탄 재질이라 무릎에 충격이 덜하다. 그 다음에는 말로만 듣던 1km 톱밥길. 푹신푹신한 것이 싫은 것은 처음이다. 신발 끈을 덜 조였나. 신발 사이로 무언가가 들어오는 것 같다. 찝찝하다. 한 번 털고 싶은데 어느덧 산길. 등산객들이 보인다. 강일구를 알아본다. “한국 핸드볼 파이팅!” 그러고 보니 내 유니폼에도 태극마크가 있다. ‘저런 체형이 태릉인?’ 아마 속으로는 의아할 거다. 경사를 최고로 높인 러닝머신과 같다. 발바닥, 종아리가 쑤신다. 강일구가 점점 멀어져 간다. 영화 ‘웰컴투 동막골’에서 강혜정의 대사가 떠오른다. “팔을 빨리 움직이면 다리가 빨라지더래요”라고. 거짓말, 그거야말로 ‘머리에 꽃달고’ 하는 이야기다. 팔을 크게 휘두르면 팔만 아프다. 산길이라 땅이 고르지 않다. 발 디딜 곳을 확인하며 뛰자니 갑갑하다. 시선을 높이자니 발을 헛디딜까 걱정이다. 눈을 어디에 둬야 할지 모르겠다. 까딱 까딱 고갯짓, 목덜미도 굳어진다. ‘과연 선수들은 어떤 생각을 하며 뛸까’하는 의문이 생겼다. 경험에 의한 추론. 첫 번째, 빨리 끝났으면 좋겠다. 두 번째, 이곳만 지나면 내리막이다. 세 번째, 발이 지면에 닿는 부분을 조금씩 달리해서 충격을 줄여봐야지. 네 번째, 끝나고 맥주한잔 했으면 좋겠다. 현수막 하나가 보인다. ‘長壽 막걸리’ 저건 분명히 장수라는 글자인데…. 무의식중에 생존 욕구가 나오나. 헛것은 아니다. 등산객을 대상으로 막걸리를 파는 곳이다. 다음을 기약. ○눈물고개 복싱 대표팀 이훈 코치가 보인다. 마지막 코스, 눈물고개가 남았다는 신호다. 이곳의 다른 이름은 깔딱 고개. 왜 그런 이름이 붙었는지 물어볼 필요도 없었다. “선수들도 이곳을 뛰어서 올라오기는 힘들다”는 것이 최 지도위원의 말. 허파가 터질 듯한 숨소리들이 들려온다. 올 것이 왔다. 2시 반에 출발한 선두 그룹이 덮쳤다. 내가 뒤로 달리는 느낌이다. 몇 명이 앞서갔는지 모르겠다. 우락부락한 상체가 휙 휙 지나갔다. 정상에서 엎드려 있는 선수들이 보였다. 박수 소리가 들려온다. 남자핸드볼 장인익, 복싱 이승배, 여자 레슬링 정진혁 코치다. 이제야 부장의 당부가 떠올랐다. “취재 보다 중요한 것은 목숨이다. 몸에 무리가 온다 싶으면 바로 관둬라.” 그래, 이제 끝이다. ○끝나기 전까지는 끝난 게 아니다 선수들은 기록과 순위가 적힌 메모지를 받고 바로 내려갔다. 안도감이 밀려온다. 숨을 충분히 고른 뒤 발걸음을 돌렸다. 그런데 이게 웬걸, 어느덧 주변에 등산객들이 많아졌다. 아무래도 길을 잘못 든 것 같다. “여기가 맞나?” 핸드폰도 없다. “태릉선수촌이요? 잘못 오셨는데.” 에라 모르겠다. 이것도 추억이다. 총소리가 들렸다. 사격장 근처다. 곧이어 도로가 보였다. 결국 택시를 잡아타고서야 선수촌으로 돌아올 수 있었다. 선수촌에서는 최 지도위원과 천 감독이 애타게 기다리고 있었다. “내가 그랬잖아. 길 잃어버리기 쉽다고.” 불암산 종주의 교훈, 역시 사람 말을 허투루 들으면 안 된다. 태릉|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양회성기자 yoh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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