물같은스승…불같은제자물불안가리는1초승부

입력 2008-05-20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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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몸이 무거워요. (찌를 곳이) 잘 보이기는 하는데 (몸이) 덜 풀린 것 같아요.” 전광판에 찍힌 점수는 2-4. 1세트를 마치고 김상훈(35·투데이코리아) 코치에게 다가선 남현희(세계랭킹3위·서울시청)의 표정이 좋지 않았다. 17일 2008 제주 SK텔레콤 여자플뢰레 국제그랑프리 개인전 32강. 남현희는 발렌티나 시프리아니(세계랭킹 38위·이탈리아)에게 고전하고 있었다. “네 거리가 아니야. 너무 멀어.”김상훈 코치가 남현희를 다독이며 짧은 한마디를 던졌다. 고개를 끄덕인 남현희가 다시 피스트에 섰다. 펜싱은 거리잡기의 싸움. 내가 찌르기 좋으면서도 상대가 공격하기 불편한 거리를 확보하는 것이 승부의 열쇠다. 단신(154cm)인 남현희는 공격 거리가 짧을 수밖에 없다. 2세트에서 역전에 성공했지만 3세트 13-8에서 점수 쌓기가 정체됐다. 콩트르 아타크(상대방이 치고 들어오면 뒤로 물러나는 척 하다가 재빨리 거리를 좁혀 역공하는 기술)에 집중되는 공격 패턴을 시프리아니도 알아챘다. “한 타이밍 쉬고 가. (상대가) 바로 막으러 들어오잖아.” 잠시 뒤, 김 코치의 입에서 만족스러운 한마디가 나왔다. “그렇지, 그거야.” 남현희는 8강에서 ‘백전노장’ 지오반나 트릴리니(6위·이탈리아)에게 패했다. 하지만 김 코치는 “작년(16강) 보다 잘했다”며 남현희를 다독였다. 마르게리타 그란바시(2위·이탈리아)가 32강에서 패배, 세계랭킹 3위를 유지할 수 있게 된 사실을 확인한 남현희도 얼굴을 폈다. 남현희는 스스로 “불의를 보면 못참는다”고 할 정도로 불같은 성격이다. 많은 펜싱인들은 “그 독한 근성 덕분에 남현희가 세계적인 선수가 됐다”고 입을 모은다. 반면 김 코치는 “조용하면서도 섬세하다”는 평을 듣는다. 펜싱협회는 4월 여자플뢰레 지도자를 교체했다. 올림픽을 100여일 앞둔 상황이라 우려의 목소리도 있었다. 남현희는 “2007년 슬럼프를 겪었을 때는 정말 다 때려치우고 싶었다”고 했다. 하지만 김 코치와 호흡을 맞추면서부터 회복세다. 남현희는 “선생님이 경기에 들어가기 전 장비를 일일이 다 챙겨줄 정도로 세심하다”면서 “(나를)이해해주셔서 호흡이 잘 맞는다”고 웃었다. 김 코치는 “(남현희가) 강한 만큼 부담을 느끼는 부분도 있다”면서 “경기 외적인 얘기도 많이 하면서 심적인 부분들을 조율하고 있다”고 했다. 남현희가 “조금이라도 해이해지면 혼을 내달라”고 할 정도로 둘 사이의 신뢰는 두터웠다. 서로 믿으니 경기 중 작전지시도 귀에 쏙쏙 들어온다. 경기 내내 팔짱을 끼고 초초한 표정으로 바라보던 김 코치에게 다가갔다. 김 코치는 “함께 경기를 뛰는 기분”이라고 했다. 남현희가 상대를 찌르기 위해 한 발 다가설 때 김 코치는 남현희의 마음속으로 한 걸음을 옮기고 있었다. 제주=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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