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희기자가간다]뱃살조로,소나기칼세례몸으로때웠다

입력 2008-06-09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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5월17일, 2008 SK텔레콤 여자플뢰레 국제그랑프리가 열린 제주한라체육관. “베잘리는 풍부한 경험을 갖고 있어 블레이드 센스(Blade sense)가 탁월한 선수로서….” 대한펜싱협회 김국현(61) 부회장 겸 대표팀 총감독이 발렌티나 베잘리(34)에 대해 설명하고 있었다. 베잘리는 세계선수권 9회 우승, 올림픽 금메달 4개에 빛나는 이탈리아의 펜싱영웅. 낯선 단어가 호기심을 자극한다. “블레이드 센스가 뭔가요?”, “어떻게 설명해야 하나? 상대를 읽는 기술인데, 펜싱을 해 봐야 아는 거라서….” 보름 뒤, ‘앎(知)의 가장 확실한 수단은 행(行)’이라는 말을 곱씹으며 태릉으로 향했다. ○ 꽉 낀(?) 조로 “다리가 찢어질 각오는 하고 오십시오.” 김국현 부회장에게 일일코치를 맡아달라고 졸랐다. 김 부회장은 1978년 제8회 방콕아시안게임 남자플뢰레 단체전 금메달과 에페 개인전 은메달을 목에 건 70년대 한국펜싱의 간판스타. 환갑이 넘은 나이에도 불구하고 선수들의 원포인트 레슨을 자청할 정도로 정열적이다. 플뢰레 김상훈(35)코치가 “김 부회장님에게 배우는 것 만해도 영광”이라고 했다. 펜싱의 가장 큰 매력은 멋. 쾌걸 조로처럼 날렵한 칼솜씨로 ‘Z’자를 만들지 않아도 좋다. 마스크를 쓰고, 칼을 잡는 것만으로도 어깨가 으쓱. 하지만 처음부터 문제가 생겼다. 숨을 쉬면 도복의 지퍼가 열린다. “활동성 때문에 원래 좀 팽팽하게 입습니다.” 연습장으로 뛰어나가며 흘깃 본 거울. 볼록한 복부 때문인지 조로의 태(態)는 나지 않았다. “일단 스트레칭과 달리기부터 합시다.” ○ 나의 키스를 그대에게 칼은 손목이 아니라 손가락으로 조종한다. 엄지와 검지로 움직이고 나머지 손가락은 칼을 잡는 데만 활용한다. 엄지를 가볍게 구부려 칼 손막이(가드) 부분에 대고, 검지의 두 번째 마디가 손잡이 아랫부분에 닿게 한다. 칼을 잡고 가장 처음 배운 것은 인사. 김 부회장은 “예절을 모르면 칼을 잡을 자격이 없다”고 했다. 차렷 자세에서 칼끝은 상대의 발목 높이 정도로 하고 양발을 90도로 모은다. 칼끝을 위로 올려 팔을 90도로 세운 뒤 가드를 입술 밑에 살짝 댄다. 다음에는 칼끝을 안쪽에서 바깥쪽으로 반원을 그리며 아래로 내린다. 김 부회장은 “나의 키스를 당신에게 보낸다는 의미”라고 했다. 이제야 멋이 난다. ○ 전·후진은 변칙리듬으로 펜싱의 기본자세는 갸르드(garde). 차렷 자세에서 양발을 90도로 모은 뒤 다리는 어깨 넓이로 벌리고 가볍게 구부린다. 전후 이동. 펜싱은 거리 감각이 승패를 결정짓는다. 전진(마르쉐)은 앞발이 먼저 원하는 거리까지 이동하고 뒷발을 구부린 상태로 재빨리 앞으로 이동시켜 갸르드를 취한다. 후진(롱페)은 뒷발을 먼저 이동한 뒤 바로 앞발을 옮기며 갸르드. 김 부회장은 “전·후진의 리듬은 다소 불규칙해야 한다”고 했다. 상대에게 리듬을 파악당하면 역공격당하기 쉽기 때문. 남자 플뢰레 최병철(27·세계랭킹8위)은 ‘펜싱계의 가르샤’다. “변칙스텝으로 상대의 혼을 뺏는다”고 했다. ○ 공격(아타크)과 방어(파라드), 역공격(콩트르 아타크) 가장 기본이 되는 공격은 찌르기(팡트). 앞 팔을 가볍게 뻗고, 손은 어깨 높이와 수평을 이룬다. 앞무릎을 힘차게 펴 발바닥이 지면을 스치듯 낮게 하면서 뒷다리로 강하게 민다. 데가즈망(상대방의 칼을 피해 찌르기), 리포스트(방어 후 찌르기) 등 모든 공격 옵션은 팡트의 응용동작. 남현희처럼 민첩한 선수들은 상대공격을 몸으로 피하면서 거리를 좁혀 찌르는 콩트르 아타크에 능하다. 하지만 몸으로 피하는 것 보다 더 적극적인 방어는 파라드다. 상대 칼의 방향만 살짝 바꿔주면 유효면을 빗겨간다. 파라드는 방어부위에 따라 프림(칼을 들지 않은 쪽의 어깨와 가슴), 스콩드(칼을 든 쪽 옆구리), 티에르스(칼을 든 쪽 가슴), 옥타브(칼을 든 쪽 아랫배) 등 8개로 나뉜다. ○ 펜싱은 대화 플뢰레에서는 공격시 발동작 이전에 팔을 먼저 펴 공격의 우선권(프리오리테)을 획득해야 한다. A의 칼끝이 B의 유효면을 위협하면 A가 프리오리테를 갖는다. 이 때 동시에 찌르면 A의 득점이 인정된다. 24분의 1초 이내의 차이로 득점불이 동시에 켜질 경우, 비디오 판독을 하는 이유는 누가 먼저 공격의사를 표현했느냐를 가리기 위함이다. B가 공격의 우선권을 갖기 위해서는 파라드를 통해 상대의 칼을 걷어내는 동작이 선행돼야 한다. 김 부회장은 이 과정을 “두 선수의 대화”라고 표현했다. A가 말을 건네면(공격의사표시), B가 대답을 해야(방어) 다시 말(공격)을 걸 수 있다. 상대방의 말에 귀를 닫는 사람에게는 권리가 주어지지 않는다. 방어의 순간, 칼이 맞부딪칠 때는 상대의 의중을 읽어야 한다. 김 부회장이 자신의 다음 공격을 예상해보라며 칼을 내밀었다. 쉴 새 없이 방어하기만 바쁠 뿐, 다음동작 예측은 언감생심. 김 부회장은 “칼이 나오는 각도가 상황에 따라 다르기 때문에 세계적인 선수들은 칼이 부딪치는 소리만 듣고도 상대가 어떻게 나올지 안다”고 했다. 이것이 블레이드 센스! 김 부회장은 “펜싱은 칼로 하는 대화”라면서 “작은 소리에도 귀를 기울여야 한다”고 했다. 소통의지를 잃어 엉망이 된 세태에 펜싱이 던지는 메시지였다. 태릉=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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