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톡톡바둑관전기]패배감보다무서운자괴감

입력 2008-09-25 00: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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반상에 100여 개의 돌이 주르륵 놓였다. “어렵네, 어려워. 그런데 두 사람 다 잘 두고 있어.” L이 말했다. “양쪽 모두 이렇다 할 실수가 안 보여. 즉 바둑이 팽팽하다는 말이지.” A가 커피 한 모금을 목으로 넘기며 말했다. 프로들은 이런 난해한 바둑을 좋아한다. 실전에서 직접 두는 것은 싫지만, 남이 두어놓은 것은 최고의 공부거리가 된다. “이게 이상하지? <실전> 흑3으로 먼저 끊어놓은 것 말이야. 드디어 홍성지가 삐끗했군.” L이 <해설1>을 천천히 늘어보였다. “흑1을 먼저 갔어야 했던 것 아닌가? 백이 2로 받으면 그때 흑이 3으로 끊는 거지.” <해설1>을 보던 A가 맞장구를 쳤다. “이건 백이 맞보기로 ‘맛’이 가는군. 백은 2로 이을 수가 없어. 그렇다면 ….” 이번에는 A가 <해설2>를 펼쳤다. “<실전>은 결국 백이 <해설2> 2처럼 늘어서 받았지. 이을 수가 없으니까. 그런데 보라고. 흑▲와 백△가 쓸데없이 교환되어 있잖아. <실전> 흑3으로 끊어놓은 수가 역시 이상했던 거야.” “흐음, 역시 바둑은 어려워. 이런 미묘한 데서 승부가 나기도 하거든. 게다가 요즘 대국은 속기전이 많아져서 깊게 읽을 시간이 절대적으로 부족해.” L이 팔짱을 끼더니 의자 뒤로 깊숙이 몸을 묻었다. 이마에는 땀이 배어 있다. 이 연구가 꽤 흥미로운 모양이었다. “실전에서 이런 걸 당하면 승부를 떠나 기분이 꽤 나쁘지. 패배감보다 무서운 게 뭐지 알아? 자괴감이라고. 대국 중 자괴감이 들면 끝장이야. 마마, 호환보다 무섭다니깐.” A의 말에 L이 피식 웃었다. “썰렁하군.” 글|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해설|김영삼 8단 1974yskim@hanmail.n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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