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체험취재]26시간의사투(?)..이경호기자영화오래보기도전

입력 2009-02-26 04:01: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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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말 영화를 원 없이 실컷 봤다. 제 1회 영화오래보기대회가 24일 서울 왕십리CGV에서 열렸다. 총 4만 여명이 참가신청을 한 이 대회에는 300명이 선발되어 도전에 나섰다. 마음껏 영화를 볼 수 있다는 점에서 영화 팬이라면 누구나 귀가 솔깃한 대회. 그래서 기자도 도전했다. 영화 담당으로 1년에 100편 이상 영화를 보고, 하루에 2편 이상 본 적도 많아 영화 오래 보기에는 나름 자신이 있었다. 지금까지 개인 최고 기록은 해외에서 본 러닝타임 4시간 28분의 ‘체’. 하지만 DVD로 ‘반지의 제왕’ 1,2,3편을 연이어 본 적도 있었다. 은근히 노르웨이에서 세워진 70시간 33분 세계 신기록에 도전해보고 싶은 용기도 생겼다. 무엇보다 이번 대회 체험 취재를 위해 출근하지 않고 하루 종일 영화만 볼 수 있다는 점이 가장 신이 났다. ○70시간 33분 세계신 깬다 의기양양 ● 오전 10시 : 대회 시작 D-2시간 대회에 참가하기 전에 간단한 건강검진을 받았다. 혈압을 재고 간단한 문진도 받았다. 건강검진을 마친 참가자들은 자투리 시간을 아껴 눈을 붙이거나 스트레칭을 했다. 이번 대회에 참가한 대학생 윤현덕 씨는 “꼭 1등해 상금 300만원을 받아 다음 학기 등록금 낼 생각이다”며 웃었다. 다른 참가자 대학원생 정일균씨는 “지난 해 한국영화를 많이 못 봤는데 평소 보고 싶었던 영화를 실컷 보기 위해 참가했다”고 말했다. 그런가 하면 “직장에 다른 이핑계를 대고 휴가를 내 절대 이름을 말할 수 없다”는 한 여성 참가자도 있었다. 그녀는 “휴가를 이틀 밖에 내지 못해 그 이상의 기록 도전은 못하는 점이 아쉽다”고 말했다. 긴장된 순간, 마침내 극장안으로 입장이 시작됐다. ○앗! 30여편 중 두편빼고 다 본 영화 ● 낮 12시 대회 시작 : 54분 만에 첫 탈락자 등장. 지금까지 영화오래보기 국내 기록은 2005년 세워진 66시간 41분이다. 하지만 이번 대회 기록을 관리한 한국기록원 김덕원 원장은 “국내에서 엄격한 규칙이 적용되는 대회는 이번이 처음이다. 지금까지는 이벤트로 열렸을 뿐이다. 한국 처음으로 공식기록을 세우는 중요한 대회다”고 밝혔다. 첫 영화는 ‘좋은 놈, 나쁜 놈, 이상한 놈’. 주최측인 CGV 홍보팀 관계자는 “한국영화를 응원하는 의미에서 30여 편의 한국 영화를 준비했다”며 상영 예정인 작품 목록을 보여줬다. 아뿔싸! 총 30여편의 영화 중에 ‘슈퍼맨이었던 사나이’와 ‘여름 속삭임’을 제외하면 모두 본 영화였다. “이미 본 영화들이라서 굉장히 불리할겁니다”는 홍보팀 직원의 걱정을 뒤로하고 시작된 ‘놈놈놈’. 이번이 벌써 네 번째 관람이다. 하지만 기자보다 더 지루한 사람이 있었나보다. 불과 54분 만에 첫 탈락자가 나왔다. 전날 신입생 오리엔테이션을 다녀온 대학 새내기로 밤샘 술자리에 감기까지 겹쳐 탈락했다. 이어 1시간 49분 만에 두 번째 탈락자가 나왔다. ○15분만에 도시락 허겁지겁 ● 6시간19분 경과 : 대회 시작 6시간 19분 만에 두 번째 영화 ‘바보’와 세 번째 ‘신기전’이 끝났다. 이때부터 도중 졸다가 탈락된 참가자, 스스로 포기한 사람이 쏟아졌다. ‘바보’와 ‘신기전’ 사이에 주어진 휴식 시간 5분을 조금 넘긴 참가자가 아쉽게 탈락하기도 했다. 오후 6시, 저녁식사로 도시락이 제공됐다. 돈가스에 콩나물국 도시락은 맛있었다. 근데 문제는 단 15분 만에 식사 및 끝내야 한다는 점이다. 허겁지겁 저녁을 먹고 앉으니 ‘순정만화’가 시작된다. 옆자리에 앉은 참가자는 “빨리 먹느라 제대로 못 먹었다. 슬슬 집에 가고 싶다”며 푸념을 했다. ○식곤증에 ‘순정만화’… 기록요원도 교체 ● 8시간 45분 경과 : ‘순정만화’가 끝났다. 역시 잔잔한 내용의 멜로는 저녁식사로 인해 밀려오는 식곤증과 합쳐져 가공할 만한 졸음을 몰고 왔다. 관람석 사이 통로에 앉아 적외선 카메라로 참가자들을 감시하는 기록요원들이 전원 교체됐다. 쌩쌩한 활기에 넘치는 기록요원들의 의욕이 느끼며 다음 영화 관람을 시작했다. ○자정 넘기자 ‘가루지기’에 30여명 KO ● 12시간 30분 경과 : 점점 피곤이 쏟아지는 시간. 하필 영화는 ‘날라리 종부전’과 ‘가루지기’였다. 두 영화 모두 장점과 나름 재미를 갖춘 작품이지만 오래보기 대회에서 특히 밤 10시가 넘은 시간에 보기에는 정말 버거웠다. 두 영화가 상영되는 동안 무려 30여명이 탈락하거나 포기했다. ○새벽에 뜬 주지훈 여성들의 엔돌핀 ● 16시간 44분 경과 : 극장 매점도 모두 문을 닫은 새벽 시간. 300명으로 시작된 도전자들의 숫자는 이제 200명 이하로 줄었다. 졸음이 밀려오는 새벽시간 다행히 ‘라듸오 데이즈’와 ‘앤티크’가 관객들에게 큰 웃음을 줬다. 두 영화 모두 흥행에 큰 성공을 거둔 영화는 아니지만 완성도가 있는 작품이고 처음 보는 도전자들이 많았다. 특히 ‘앤티크’ 주지훈 덕분에 여성 도전자들의 눈이 반짝인다. ○신현준 ‘마지막 선물’ 탈락자 속출 ● 18시간 40분 경과 : 당초 알려준 상영 계획표에는 ‘미인도’와 ‘아내가 결혼했다’가 있었다. 두 편의 뜨거운 영화가 졸음을 날려 줄 것으로 기대됐다. 하지만 두 영화 대신 주최측은 도전 17시간 만에 의외의 카드를 꺼내들었다. 바로 신현준 주연 휴먼 드라마 ‘마지막 선물’. 가만히 있어도 졸음이 쏟아지는 새벽시간에 등장한 이 영화의 맹활약(?)으로 탈락자가 속출했다. ○21시간, 처음본 슈퍼맨이 응원을 하고 ● 21시간 5분 경과 : 가장 큰 고비가 19시간째 찾아왔다. 시계는 오전 7시를 가리켰다. 저절로 감기는 눈꺼플의 무게에 못이겨 잠깐식 졸다 깨다를 반복했다. ‘5초 동안 눈을 감을 수 없는’ 제 1규칙을 어겼는지 감시가 집중된다. 다행히 코믹한 ‘강철중’의 익살로 위기를 넘긴다. 마침 11편 만에 처음 보는 영화인 ‘슈퍼맨이었던 사나이’가 힘을 준다. 아침식사. 역시 15분 만에 도시락을 먹어야 한다. 이제는 졸음보다 생리적 문제가 더 큰 벽으로 다가온다. 1편 끝날 때마다 5분, 3편이 끝나면 15분씩 주어지는 휴식 시간은 생리 욕구를 모두 해결하기에 너무 짧다. 밤새 잠을 못잔 상황이라 속도 더부룩하다. 포기하고 싶은 마음이 간절해진다. 기록요원들의 감시보다 ‘이제 그만하자’고 마음 속에서 속삭이는 나 자신과 싸우는게 더 힘들어진다. 초콜릿과 음료수를 나눠주며 격려하던 든든한 옆자리의 참가자도 결국 22시간 2분 만에 탈락했다. 참가자가 절반인 150명 이하로 줄어들자 기록요원들의 감시는 더 집중된다. 꼭 1등해서 등록금 벌겠다던 윤현덕 씨는 “온 몸이 쑤신다”며 쓴웃음을 지었다. ○24시간 돌파, 40시간도 갈 것 같은데… ● 24시간 경과 : 드디어 24시간을 돌파했다. 정말 하루 온 종일 영화만 봤다. ‘무방비 도시’ 손예진의 섹시한 매력과 김명민의 카리스마는 졸음을 날려준다. 이상하게 몸이 쌩쌩해지고 가볍다. 이대로라면 30시간은 물론 40시간까지도 충분히 가능할 것 같다. 참가자들은 이제 95명만 남았다. ○세번째 도시락에 그로기… 박진희가 날 비웃네 ● 26시간 58분 경과 : 탈락 세 번째 도시락으로 점심을 먹었다. 그런데 자리에 앉자마자 지금까지 느낀 졸음과는 차원이 다른 피곤이 몰려온다. 스크린에는 ‘달콤한 거짓말’ 박진희가 웃고 있지만 눈에 들어오지 않는다. 정신 줄을 놓은 것처럼 머리가 내 의지와 상관없이 앞뒤로 흔들린다. 결국 탈락했다. 이제 편히 잘 수 있다는 기쁨과, 좀 더 좋은 기록을 세우지 못한 아쉬움이 교차된다. 한국기록원에서 발급한 기록 인증서를 받고 아직 객석에 남아있는 94명의 도전자들에게 진심으로 우러나오는 응원의 박수를 치며 도전을 끝냈다. 이경호 기자 rush@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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