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영희기자가간다]“뱃살보니가짜네”딱걸린짝퉁턱돌이

입력 2009-06-23 07:30:00
카카오톡 공유하기
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너 누구야?” 일일 턱돌이 체험에 나선 전영희 기자(왼쪽)가 21일 목동 한화-히어로즈전 더블헤더 2경기 시작을 앞두고 우효동 심판에게 공을 전해주면서 턱돌이 마스크를 살짝 들어올리며 인사하고 있다. 목동 | 임진환 기자 photolim@donga.com

히어로즈‘턱돌이’체험
그에게는 ‘말’이 없다. 대화하고 싶어도 입은 움직이지 않는다.

그에게는 ‘표정’이 없다. 짙은 눈썹에 동그란 눈동자, 약간 벌린 입에 주걱턱. 내리쬐는 코로나의 열기가 그의 콧잔등을 때려도, 화석처럼 단단한 얼굴은 단 한번도 찡그려 진 적이 없다.

유일한 언어는 의상과 몸짓. 말과 표정을 잃어버린 답답함 때문에 그의 몸놀림은 더 간절하고, 역동적이다. 응원소리가 뒤엉켜 있는 야구장. 그 ‘소음의 공간’에서 그는 찰리 채플린의 것보다 더 희극적인 ‘무성영화’를 써내려갔다.

영화 ‘몽상가들’을 보면, 주인공들이 채플린과 버스터 키튼 중 누가 더 위대한 무성영화의 전설인가를 논쟁하는 대목이 나온다. 최소한 턱돌이를 보면, 키튼이 한 수 위다. 채플린은 표정을 통해 다양한 감정을 표현했지만, 턱돌이는 키튼처럼 철저히 몸 개그로만 승부한다. 그 원초적인 슬랩스틱 덕분에 이제 그는 대한민국의 야구팬들에게, 채플린만큼이나 강렬한 존재다. 과연 주걱턱 가면 뒤에 숨겨진 그의 표정은 어떤 것일까. 21일 한화와 히어로즈의 경기가 열린 목동야구장. ‘히어로즈의 히어로’ 턱돌이의 가면을 썼다.

턱돌이 마스크 수여식. 목동 | 임진환 기자 photolim@donga.com


○“긴장하지 마세요. 체형이 캐릭터예요.”

가는 날이 장날. 전날 비가 퍼붓는 바람에 더블헤더 경기. 햇볕은 쨍쨍거리고, 그라운드는 반짝거렸다. 턱돌이 길윤호(26)씨와의 첫 만남. “기자님은 저 쪽에서 걸어오는 것부터가 예사롭지 않으신데요. 원투 쓰리 포, 스텝 좋아요.” 그는 가면을 벗어도 유쾌했다.

한 때 한국프로야구에는 이종범(39·KIA), 김홍집(38·전 태평앙·한화) 등 홈경기만을 사수한 무적의 공익근무요원들이 있었다. 턱돌이 역시 투잡(two-job)족. 관련기관들의 허락 하에 낮에는 지하철 도곡 서비스센터(센터장 신경우)에서 일하고, 저녁에는 야구장으로 향한다.

“들어오세요. 제 의상실입니다.” 촘촘히 걸린 수 십 여벌의 무대(?)의상이 손짓을 하고 있었다. 철학자 앙리 베르그송은 “생명력이 있는 것처럼 보이면서도 동시에 기계적인 배열이 분명하게 느껴지는 행동과 사건은 모두 희극적”이라고 했다. 철저히 기계적인 턱돌이의 가면. 그곳에 생명력을 불어넣는 것은 의상과 과감한 액션이다.

‘저런 반짝이 옷을 어떻게 입고 나가지’하는 생각부터 ‘과연 몸에 맞기는 할까, 관중들에게 웃음을 줄 수는 있을까’하는 생각까지. 표정이 굳었다. “너무 긴장하지 마세요. 일단, 체형이 캐릭터시니까.” 칭찬인지, 욕인지. 여하튼 긴장은 서서히 풀렸다.

 


○물 돌리고, 선물 만들고, 융단 깔고. ‘바쁘다 바빠.’

“스텝부터 따라해 보세요.” 게걸음처럼 양 옆으로 ‘왔다 갔다.’ 무뚝뚝해진 그의 표정에서 한 번 혼날 것을 예감하고 있었다. “기자님의 뱃살이 문제인 것 같아요.” 복근운동을 시킨다며, PT체조. 그라운드에 나서기도 전에 ‘배돌이’는 지쳐버렸다.

더블헤더는 선수들에게만 곤욕이 아니다. 길윤호씨는 “잠시 휴식을 취하려고 사무실에 들어와 앉아 있다가 잠이 든 적도 있었다”고 털어놓았다. 1차전에서 노하우를 전수 받은 뒤, 2차전부터 투입하기로 결정.

1차전이 시작됐다. 시구·시타를 맡은 노노 야구단 할아버지들에게 재롱을 피우던 턱돌이. 갑자기 굵은 땅방울을 흘리며, 얼음물을 만들기 시작한다. “다른 분들도 얼마나 더우시겠어요.” 턱돌이는 관중들에게만 인기가 많은 것이 아니다. 응급처지 요원들부터, 심판들까지. 턱돌이에게서 건네받은 시원한 물 한 잔에 모두들 더위를 씻었다.

다음으로 향한 곳은 구단사무실. 히어로즈 웹디자이너 이정연씨의 도움으로 ‘심판계의 턱돌이’ 최규순(44) 심판에게 줄 선물을 만들었다. 컴퓨터 그래픽을 활용, 턱돌이의 얼굴로 장식된 하트 모양 테두리 안에 최 심판의 사진을 넣었다. 1500경기 출전 기록을 세운 베테랑 최 심판은 “수많은 경기에 나섰지만, 저렇게 열심히 하는 마스코트는 처음 본다”며 혀를 내둘렀다.

선물을 두고, 순식간에 사라진 턱돌이. 2회말 그가 하와이언 복장을 하고, 빨간 융단을 든 채로 그라운드에 서자마자 클리프 브룸바(35·히어로즈)의 홈런이 터졌다. 브룸바는 턱돌이가 깔아놓은 융단을 사뿐히 즈려밟고, 홈플레이트로 향했다. “클린업트리오가 나오면, 항상 융단을 준비합니다. 언제 (홈런이) 터질 줄 모르니까요.” 그는 경기장 안에서나 밖에서나 잰 걸음. 따라다니는 것만으로도 숨이 가쁘다.

○“어, 뭐야 다른 턱돌이네.”

1차전 종료 후 저녁식사를 마치고, 투입준비. 2차전 1회, 주심에게 공을 전해주는 것이 첫 번째 역할이었다. ‘심판에게 어떻게 장난을 칠까’ 수 십 분의 고민도 막상 우효동 심판의 위엄 있는 얼굴을 보자, 싸악 사라졌다. “어, 뭐야. 다른 턱돌이네.” 가면을 살짝 벗고 인사를 하자, 우 심판도 짐짓 놀란 표정. 창피함에 공만 주고, 달려 나왔다. 싱겁게 첫 번째 출연 마무리.

5회 종료 후 클리닝타임. 그라운드를 고르는 역할로 재등장. 관중석을 슬쩍 바라봤다. 여기저기 부산스러운 인파들. 배돌이의 존재감을 알리고 싶었지만, 재간이 떠오르질 않는다. 관중들을 향해 손 한번 들었다가 다시 소처럼 열심히 그라운드만 정리하고 나왔다.

“위(관중석)로 한 번 가보실래요?” 시무룩하게 있자, 원조 턱돌이가 또 한 가지 임무를 건넸다. 처음만난 팬들은 한화 유니폼을 입고 있었다. “사진 좀 찍어주세요.” 홈·원정 팬을 가리지 않는 것이 턱돌이의 응원 철학. 기쁜 마음으로 사직을 찍는데…. “엇, 턱돌이 아니시죠!”, “네. 티 많이 나요?” 턱돌이 길윤호씨는 한 때, 한화 마스코트 ‘위니’로도 활동해, 한화 팬들에게도 익숙한 존재.

 


○‘얘들아 울지 마.’ 초보 턱돌이의 굴욕

순수한 어린이들로 공략 대상을 바꿨다. 하지만 다가가 손을 내밀면, ‘엉엉’ 울면서 엄마를 부르기 일쑤. 가면을 벗었더니 이제 손사래까지 치며, 더 크게 운다. 가면을 벗을 수도, 쓸 수도 없다. 길윤호씨는 “턱돌이의 인상이 너무 강렬해 처음에는 우는 어린이들이 많았었다”고 회상했다. 어린이들의 눈물이 잦아진 것은 순전히 턱돌이가 친근하게 다가서려고 노력한 덕분. 턱돌이는 특히, 여성 팬들에게 인기가 많다. 한 여성팬은 “턱돌이가 유머러스한데다가 엉덩이도 섹시하다”면서 “좀 소개시켜 달라”고 구애공세까지 펼쳤다. 미녀들의 사진촬영요구가 이어졌다. 가면 속 얼굴에는 땀이 차올라 앞이 잘 보이지 않고, 팔짱과 어깨동무 세례에 정신은 더 흐릿해 진다. 관중보다 더 부끄러워하는 ‘배돌이.’

히어로즈의 2연승으로 하루가 저물었다. 라이트가 하나 둘씩 꺼지고, 길윤호씨도 가면을 벗었다. 땀에 젖은 그는 숨을 고르고 있었다.

“프로에 오려고 고등학생들은 몸을 던지잖아요. 그런데, 막상 프로선수들이 전력질주도 안하고 투지가 없는 모습을 보면, 참 답답했어요. 나한테는 그렇게 하고 싶던 야구였는데…. 그래서 결심했죠. 경기장 안에서 나부터 열심히 하는 모습을 보여주자.”

‘역전의 명수’ 군상상고 2학년 때까지 그는 야구선수였다. 비록 부상으로 프로야구선수의 꿈은 이루지 못했지만, 야구장 안에서 박수를 받고 싶다던 소망은 결국 이뤘다. 길윤호씨는 “내 삶의 역전 비결은 허슬플레이”라며 경기장을 나섰다.

목동 | 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뉴스스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