전차 몰다 다친 이중사, 시장서 손수레 몰며…

입력 2010-04-20 03:00:00
카카오톡 공유하기
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전차 몰다 다친 李중사, 시장서 손수레 몰며 생계
청춘을 바쳤건만…
“할 줄 아는게 뭐냐” 핀잔
전역자 절반은 재취업 실패
퇴직금 사기당하기도 일쑤

두려운 ‘사오정’ 신세
계급정년에 ‘40대 은퇴’ 속출
자녀교육 등 순식간 타격
장교출신이 부사관 지원도


“이 중사, 지난번 원단 그거 100마만 가져다 줘.”

서울 동대문시장 원단상가 골목에서 배달을 하는 이형철 씨(33)는 ‘이 중사’로 통한다. 군인 출신이라는 걸 자랑스러워하는 이 씨는 배달을 갈 때면 견장에 갈매기 두 개, 즉 중사 계급장이 붙은 군복을 늘 입는다.

여전히 중사 계급장 달고… 19일 예비역 육군 중사 이형철 씨가 서울 동대문시장 원단상가에서 원단 배달에 나섰다. 그는 시장에서 ‘이 중사’로 불린다. 군에서 허리를 다치고 전역한 후 아르바이트를 전전하고 있지만 여전히 군복이 자랑스럽다. 아직도 배달을 다닐 때면 어깨에 중사 계급장이 붙은 잠바를 입는다. 김재명 기자

육군 기갑부대에서 직업 군인으로 6년간 근무한 그는 20대 청춘을 전차와 함께 보냈다. 군에서 정년을 채우고 싶었지만 2006년 12월 어쩔 수 없이 제대했다. 2003년 겨울훈련 때 전차를 타고 가다 연료탱크에서 올라온 가스에 질식해 언 바닥에 떨어졌다. 이 씨는 사고 후 허리에 심한 통증을 느꼈지만 참으면서 3년을 보내다 2006년 9월 허리에 쇠침을 4개나 박는 수술을 받았다. 수술 후 심사에서 그는 군복무를 하기에 부적합하다는 판정을 받았다. “쓸모없는 인간이 된 거지요.” 평생 군인으로 남고 싶었던 그는 군복을 벗었다. 남은 것은 퇴직금 1200만 원과 한 달에 80만 원을 받는 국가유공자 6급 연금이 전부다.

베레모를 쓴 ‘지상의 왕자’를 꿈꿨지만 지금은 보증금 500만 원, 월세 20만 원짜리 지하 단칸방에서 두 아이와 함께 네 식구가 산다. 점심 값을 아끼려고 도시락을 싸갖고 다니며 원단상가에서 한 달에 130만 원 정도 받는 배달 아르바이트를 2년 반째 하고 있다.

○ 좁기만 한 재취업의 문

군 출신들은 전역을 하면 재취업할 곳이 마땅치 않은 현실을 가장 걱정한다. 이 씨도 제대 뒤 안 해본 일이 없다. 전역 군인 중에는 다단계 피라미드사업에 발을 들여놓거나 사기를 당하는 경우가 많다. ‘군인 퇴직연금은 먼저 본 사람이 임자’라는 우스갯소리도 있다. 서울제대군인지원센터 방명현 사업부장(53)은 “사기를 당한 것 같은데 어떻게 하면 좋으냐는 상담 전화가 많이 걸려온다”고 말했다. 전역을 앞둔 한 해군 중령은 초등학교 동창이 같이 당구장을 내자는 제안에 20년 이상 근무하면 받는 퇴직연금 1억6000만 원을 한꺼번에 날렸다고 한다.

육군3사관학교 출신으로 계급정년에 걸려 23년 10개월 만에 군복을 벗고 지난해 10월 육군 소령으로 전역한 조모 씨(46)는 한 달에 60만 원을 받는 컨설팅업체 인턴으로 일했다. “첫 출근 때 나이 어린 상사에게 ‘당신이 상담을 할 줄 아느냐’는 핀잔부터 들었습니다. 나이만 먹었지 경력은 하나도 없다는 겁니다.” 결국 조 씨는 취업컨설턴트의 꿈을 접고 아는 사람의 사업을 도와 농사용 울타리 판매 영업사원으로 뛰고 있다. 조 씨는 한 달에 180만 원 정도의 연금을 받고 있다. 그러나 아파트 구입 대출금 2억 원을 갚느라 손에 남는 것은 별로 없다. 여기에 대학생인 두 자녀를 졸업시키려면 턱없이 부족하고 아직도 4, 5년은 안정적인 소득이 필요하다. 조 씨는 고민 끝에 아들에게 입대를 권유했다. “딸이 중간고사를 앞둔 주말에도 새벽에 일하러 갑니다. 내가 아버지 역할을 못한다는 생각에 죽고 싶다는 생각을 한 적도 있습니다.”

국가보훈처 제대군인국에 따르면 2004년부터 2008년까지 5년간 직업군인 전역자 2만7270 명 가운데 재취업에 성공한 사람은 1만3779명(50.5%)으로 절반에 불과했다.

○ 퇴직자 대부분이 ‘사오정’

군인이나 경찰, 소방공무원이라고 하면 ‘안정적인 직장’을 장점으로 꼽지만 정작 많은 이들이 45세면 정년퇴직하는 ‘사오정’ 신세다. 군인은 소령에서 진급이 안 되면 45세에 정년을 맞는다. 경찰도 경감 이하는 58세 연령 정년이 있지만 그 이상의 경우 계급정년이 있어 40대에 퇴직하기도 한다. 서울제대군인지원센터에 근무하는 한 예비역 소령(45)은 “40대라면 인생의 절정기”라며 “자녀 교육 등 가장 돈이 많이 드는 시기에 전역하는 게 큰 부담”이라고 토로했다. 정년은 이른데 취업은 쉽지 않다 보니 최근 들어 장교로 전역한 이들이 부사관에 다시 지원하는 경우도 늘고 있다. 국방부에 따르면 2008년 부사관 7500명 모집에 전역한 예비역만 897명이 지원했다. 2007년에 비해 74.2% 증가한 수치다.

○ 재취업 및 재무 설계 지원 없어

국방부가 올해 처음 공개한 ‘군인복지 실태조사(2008년)’에 따르면 군인의 61.4%가 전역 이후 생활을 염려하고 있었다. 가장 걱정하는 건 경제적인 문제(50.5%)였고 재취업 문제(31.8%)가 뒤를 이었다. 군인들의 경우 퇴직 후 연금을 받기는 하지만 잦은 인사이동으로 이사가 잦은 데다 직무 특성상 지시를 받아 수행하는 수동적인 생활이 몸에 배 재테크를 대부분 잘 못한다.

퇴직 후 삶에 대한 부담이 크지만 이들을 위한 재취업 지원이나 퇴직 이후 재무설계 등을 체계적으로 돕는 전담 부서나 프로그램은 거의 전무한 실정이다. 경찰은 희망산하단체에 취업을 추천하는 재취업 추천프로그램이 있지만 총경 이하 초급 간부는 해당되지 않는다. 소방방재청 인사과 담당자는 “소방관의 경우 전역 후 생활을 돕는 프로그램이 없다”고 밝혔다. 그나마 군은 2004년부터 제대군인지원센터를 운영해 전역자들의 재취업과 사회적응을 돕고 있다.

국가보훈처 제대군인국 이성춘 국장(45)은 “전역한 군인과 사회의 눈높이가 다르다는 점이 큰 문제”라며 “미군은 교육 프로그램이 잘돼 있어 전역 후 사회에서 우수한 인력으로 평가를 받고 바로 채용된다. 한국도 경력관리를 체계화할 필요가 있다”고 말했다.

신민기 기자 minki@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유근형 기자 noel@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최예나 기자 yena@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뉴스스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