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빠 몰래 태권도를 배우던 딸은 어느덧 KLPGA 투어 블루칩으로 성장했다. 이보미의 아버지 이석주(왼쪽) 씨가 딸로부터 우승컵을 받고, 트로피에 담긴 맥주를 마시고 있다.
5학년 여름방학 생애 첫 골프채 쥐고
연습장 찾아 매일 미시령고개 넘기도
고등학생땐 대회나가면 우승 휩쓸어
“골프 안 시켰으면 태권도 선수가 됐을지도 모르죠. 이렇게 될 줄은 정말 몰랐어요.”
올 시즌 한국여자프로골프(KLPGA) 투어의 블루칩으로 성장한 이보미(22·하이마트·사진). 골프에 입문하게 된 계기가 독특하다.
강원도 인제 출신의 시골소녀가 국내 여자프로골프 1인자가 되기까지는 우여곡절도 많았다. 26일 인천 영종도 스카이72 골프장을 찾은 이보미의 부친 이석주 씨로부터 성장기를 들었다.
“어느 날인가 태권도장 관장이 찾아와서는 ‘왜 보미 도복 값을 안주세요?’라고 묻더라고요. 이게 무슨 소린가 했더니 부모 모르게 일주일 전부터 태권도를 배우고 있었더라고요. 혹시 우리에게 들킬까봐 도복은 친구네 집에 두고 도장에 다녔던 거죠. 그래서 보미에게 ‘여자가 태권도 배워서 누굴 패려고 그러냐. 그러려면 차라리 골프나 배워라’고 했죠. 그게 골프에 입문한 계기죠.”
당시가 1998년이다. 이보미가 초등학교 5학년 때고, 박세리가 미 LPGA 투어 US여자오픈에서 우승했던 해다.
때마침 동네에 허름한 골프연습장이 하나 들어섰고, 부친 이 씨는 여름방학을 맞아 딸에게 태권도 도복 대신 골프채를 쥐어줬다. 그렇게 우연한 계기에 시작한 골프는 이보미의 인생을 바꿔 놨다.
초등학교 시절 공부도 꽤 잘해 선생님이 “왜 운동을 시키려고 하느냐”며 만류하기도 했지만 그때의 선택이 지금의 이보미를 만들었다. 그렇다고 제대로 시작한 것도 아니다. 여름방학 때 1개월 정도 골프를 배웠지만 곧 겨울이 돼 중단했다.
연습장 시설이 워낙 허름했던 터라 겨울엔 골프를 할 수가 없었다.
본격적으로 시작한 건 6학년 때다. 골프채도 없어서 연습장에서 쓰는 연습용 골프채를 들고 스윙을 배웠다. 처음 본인의 골프채를 갖게 된 건 그로부터 1년 뒤인 중학교 1학년 때다. 고등학생이 되면서 강원도내 최강의 선수가 됐다. 나가는 대회마다 우승트로피를 휩쓸어와 지역 내에서는 유망주로 손꼽혔다.
당시 이보미와 함께 골프를 했던 동료들은 지금 모두 국내를 대표하는 스타로 성장했다. 2살 많은 김경태(24·신한은행)와 3살이 적은 노승열(19·타이틀리스트), 아시안게임 국가대표로 발탁된 박일환(속초상고2), 신한동해오픈에서 공동 6위로 깜짝 스타가 된 중학생 골퍼 김시우(육민관중3)가 함께 운동했던 선후배다.
이 씨는 “그때만 해도 연습환경이 변변치 않았죠. 원통에서 속초를 가기 위해 매일 두 번씩 미시령 고개를 넘어 다녔어요. 그곳에 가야 쇼트게임과 라운드를 할 수 있었기에 그렇게 할 수밖에 없었죠. 다행히 그때 동고동락했던 선수들이 모두 훌륭하게 자라서 기쁩니다”라고 말했다.
이보미는 올해 KLPGA 투어에서 3승을 기록 중이다. 상금랭킹과 대상, 다승, 최저타수 등 타이틀 전 부문에 걸쳐 1위에 올라 있다. 29일부터 인천 영종도 스카이72골프장에서 열리는 LPGA 하나은행 챔피언십에 출전하는 이보미는 이 대회 뒤 11월 3일부터 열리는 일본투어 Q스쿨에 도전한다.
사진제공|이보미 팬 카페
영종도|주영로 기자 na1872@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