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건의 아날로그 베이스볼] 아프지 않은 팔로 그 때 그 공으로 나지완과 붙고싶다

입력 2012-05-17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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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9년 한국시리즈 7차전 이후 SK 채병용은 수술과 병역, 그리고 고된 재활 속에서 2년 반의 시간을 보냈다. 그는 마운드에 다시 서게 되는 날, KIA 나지완과의 재대결을 손꼽아 기다리고 있다. 스포츠동아DB

2009년 SK ‘비운의 투수’ 채병용

세상은 점점 디지털 시대로 발전하지만 야구는 아날로그 시대와 달라진 것이 없다. 130여년 전 야구가 시작된 이래 수비수는 9명이고, 투수가 공을 던져야 경기는 시작된다. 세월의 저편에 있는 추억의 야구인과 경기 속에 숨어 있던 스토리를 아날로그적인 시각으로 전하려고 한다.<편집자 주>


당시 탈난 팔꿈치로 무리한 등판
진통제도 소용없어 꾹 참고 던져
결국 나지완에 끝내기포 맞고 눈물
내가 안아팠다면 칠수 없었던 공…


그 후 수술대…2년6개월간 재활
이제 90% 몸으로 라이브배팅 돌입
마음의 상처요? 좋은 경험이었죠


리틀야구선수부터 사회인야구선수까지 단 한번이라도 캐치볼을 하고 배트를 휘둘러봤다면 이들의 꿈은 하나다. 모든 야구인들의 로망. 바로 한국시리즈 7차전에서 끝내기홈런을 치는 것이다. 1982년부터 지난해까지 29차례 펼쳐진 한국시리즈에서 시리즈를 결정하는 끝내기홈런이 터진 것은 단 2번이었다. 2002년 LG-삼성의 6차전 마해영의 홈런과 2009년 SK-KIA의 7차전 나지완의 홈런이다. 그 한방으로 삼성은 한국시리즈 비원을 풀었고, KIA는 ‘V10’을 달성했다. 야구팬들의 머리 속에서 영원히 기억될 7차전 끝내기홈런을 맞은 비운의 투수는 SK 채병용(30)이다. 마운드를 내려와 서럽게 울던 모습이 뇌리에 생생하다. 2년 반이라는 세월은 그 아픈 기억을 어느 정도 치유해줬을까. 15일 인천 문학구장에서 재활을 위해 땀을 흘리고 있는 채병용을 만났다.


○2009년 10월 24일, 운명의 한국시리즈 7차전

-당시 팔꿈치 인대가 너덜너덜한 상태로 공을 던졌는데 아프지 않았나? 그런 상태에서 전력으로 공을 던지면 어떤 느낌인지 궁금하다.


“끊어지는 느낌이었다. 전기가 찌릿찌릿하게 오는 것의 몇 배나 되는 느낌? 그냥 참고 던졌다. 진통제 주사를 맞아도 소용이 없었다. 공 하나라도 던지기 위해 마운드에 올랐다. 시리즈를 마치면 수술을 하고 군에 가기로 돼 있어서 해보자고 생각했다.”


-그런 상태였다면 안 던질 수도 있지 않았나?

“사실 6차전에 던지고 난 뒤부터 내 팔이 아니었다. 6차전은 나갈 준비도 하지 않은 상태에서 부랴부랴 세이브를 하러 올랐다.(4차전 선발에 이은 2번째 등판) 그 때문에 7차전 아침에는 팔이 마비되는 느낌이었다. 오늘은 안 던진다고 생각하고 경기장에 왔다. 그런데 8회가 되자 덕아웃의 김성근 감독님과 눈이 마주쳤다. 그 순간 ‘내가 준비해야겠구나’라고 생각했다. 더 던질 다른 투수도 없었다.”

프로야구 30년 최고 명장면 중 하나. 그러나 모두 2009년 한국시리즈 7차전 끝내기홈런의 주인공 KIA 나지완(오른쪽)만을 기억할 뿐이다. 당시 잠실구장 마운드 위에 덩그러니 서 있었던 또 다른 주인공은 SK 채병용이었다. 스포츠동아DB




-나지완에게 맞은 공과 당시 상황을 지금도 기억하는가. 기록지를 뒤져봤더니 볼카운트 2-2에서 시속 143km의 높은 직구였다.

“절대 잊지 못한다. 그 상황이 다시 와도 또 같은 공을 던질 것 같다. 물론 이번에는 아프지 않은 팔로 던질 것이다. 놓는 순간 공이 빠져나가는 느낌이었다. 실투였다. ‘아, 끝났구나’라고 생각했다. 그래서 뒤도 돌아보지 않았다. 팔이 안 아팠을 때라면 그 공은 칠 수 없는 공이었다. 상태가 나쁘다 보니 힘이 빠졌고, 지완이처럼 힘 있는 타자라면 홈런을 치기 좋았다.”


-공교롭게도 나지완이 신일고 후배다.

“며칠 뒤 동창회에서 지완이를 만났다. ‘잘 했다, 수고했다’고 축하해줬다. 홈런을 쳤다고 때릴 수는 없는 것 아닌가. ‘나 때문에 우승하고 MVP가 됐으니 밥이라도 사라’고 했는데 아직 그 밥을 먹지 못했다.”


○아물지 않은 상처? 고단한 재활!

사실 이번 인터뷰를 앞두고 같은 내용으로 LG 최원호 재활코치를 섭외했다. 2002년 LG-삼성전 끝내기홈런의 기억을 물어보고 싶었다. 그러나 최 코치는 아직 그 기억을 떠올리기 싫었는지 홍보팀을 통해 정중히 거절했다. 이해가 됐다. 투수에게는 정말 큰 상처일 수 있으니까. “난 상처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 경기 뒤 며칠 동안은 ‘왜 그랬을까’하고 자학도 하고 상처도 받았지만 그 이후로는 아쉬움으로만 남았다. 그것을 겪고 나서 한 단계 더 성숙한 투수가 될 것이라고 믿는다. 뼈아프지만 좋은 경험이었다고 생각한다.”(채병용)


-시리즈를 마친 뒤 수술하고 지금 재활을 하고 있다. 재활도 보통의 인내가 아니면 쉽지 않은 과정일 텐데.

“2009년 11월 팔꿈치 인대 4조각을 붙이는 수술을 받고, 2년 6개월째 재활 중이다. 힘들었다. 많이 울었다. 내가 왜 이 짓을 하고 있는지 모르겠다는 생각에 우울증도 왔었다. 믿음이 없어지고 시간만 자꾸 흘러간다는 느낌? 2004년에도 1년간 재활을 했지만 그때는 당연히 해야겠다는 생각이어서 몰랐는데, 2번째 재활은 더 힘들었다. 이제는 즐기면서 하고 있다. 80∼90% 몸은 만들어졌다. 현재 라이브배팅 단계까지 갔다.”

재활은 시간과의 싸움, 자기 자신과의 전쟁이다. 상대가 없어 더 힘들다. 투수가 팔꿈치 수술을 받은 뒤 근력을 만드는데 6개월 정도 걸린다. 일반인이라면 그것으로 끝이지만 야구선수에게는 반복되는 다른 훈련이 기다리고 있다. 우선 수건으로 피칭 동작을 하는 새도 피칭. 이어 5m도 안되는 가까운 거리에서 공을 던지는 네트피칭이 있다. 단순하면서도 반복적인 일이다. 이후 10m, 15m, 20m 등 거리를 70m까지 늘려가며 공을 던진다. 그 단계를 넘어서면 하프피칭을 한다. 통증이 오면 피칭을 멈추고 다시 치료를 받은 뒤 그 단계에서 다시 시작한다. 채병용은 네트피칭을 ‘단순하다’고 표현한 기자의 말을 수정해줬다. 중요한 단계라고 했다. 새로운 근육에게 ‘내가 이제 공을 던진다’고 느끼게 해줘야 하는 단계라면서 쉽게 보면 안 된다고 했다.


○메이저리그가 꿈이었던 ‘야수 채병용’의 변신

채병용은 운명적으로 야구선수가 됐다. 어릴 때부터 야구가 좋았다. 전주에서 쌍방울의 경기가 열리면 군산에서 버스를 타고 와서 볼 정도로 좋아했다. “어릴 때부터 논으로, 들로 다니면서 돌을 던지는 것을 좋아했다.” 김원형 SK 코치의 피칭을 보면서 투수의 꿈을 키웠다. 군산초등학교에서 야구를 시작해 군산중을 거쳐 서울 한서고에 진학했다. 고향에선 야구 유망주의 전출을 반대했지만 어머니는 서울행을 고집했다. 가장 형편은 그다지 넉넉하지 않았지만 주위의 많은 도움과 3남1녀의 막내인 채병용을 나이차 나는 형들이 사랑해줘서 큰 힘이 됐다. 최종 졸업학교가 신일고가 된 것은 고 1때 감독이 학교를 그만두면서였다. 신일고 시절 방망이도 잘 쳐 한때 메이저리그의 꿈을 키웠다. 2001년 신인드래프트 2차 6번째 지명선수로 SK 유니폼을 입었다. 계약도 가장 마지막에 했다. 야수로 메이저리그 입단 테스트를 받았으나 결과가 나빴다. 7000만원의 계약금을 받고 프로선수가 됐다. 내야수로 지명을 받았다. 여기서 인생을 바꾼 결정이 나왔다. 입단한 첫날 최계훈 당시 재활코치가 투수와 야수 가운데 어떤 것을 하겠냐고 물었다. 주저 않고 투수를 하겠다고 했다. 터닝 포인트였다. 그때부터 투수로서 처음부터 다시 시작했다.


○눈물 속에 피어난 새로운 희망

-2009년이 워낙 기억에 남아서 그렇지만 2003년 SK와 현대의 한국시리즈 6차전 때도 잘 던졌는데.


“그때는 젊으니까 자신이 있었다. 3차전 때 처음으로 한국시리즈 마운드에 올랐다. 정말 다리가 떨린다는 것이 어떤 것인지 실감했다. 1회를 간신히 던지고 나면서 차츰 안정을 찾았다. 6차전 때는 선발로 나가 승리투수가 됐다. 그때부터 배짱이 있는 투수라는 말을 들었다. 사람들은 2009년을 기억하겠지만, 2008년 두산을 상대로 우리가 우승했을 때 마지막에 마운드에 있던 투수가 나였다.”

운명의 그날, 잠실구장을 찾은 가족과 아내는 채병용보다 더 눈물을 흘렸다. 언젠가 야구 유니폼을 벗겠지만 2009년의 그 한방은 채병용을 영원히 따라다닐지도 모른다. 다시 한국시리즈에 나갔을 때가 궁금했다.

“물론 그런 일(끝내기홈런 허용)은 안 생겨야겠다. 한번 더 지완이와 붙어보고 싶다. 시리즈가 아니더라도 지완이를 상대할 때는 아무래도 기억이 날 것 같다.”

프로야구의 멋진 전설은 항상 에이스의 눈물 속에서 태어난다.

전문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kimjongk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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