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종건의 아날로그 베이스볼] ‘청룡의 전설’ 된 원조멀티맨 이광은

입력 2012-09-06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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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광은 배재고 감독은 스스로에 대해 “A는 받았지만 A+를 받지는 못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팀에선 늘 요긴한 선수였어도 
태극마크는 달 수 없었던 사나이. 그러나 그는 언제나 팀을 위해 몸을 던지면서 손해를 감수하는 진짜 ‘남자’였다. 이 감독이 
선수시절 못지않은 힘찬 기운으로 방망이를 휘두르고 있다. 박화용 기자 
inphoto@donga.com 트위터 @seven7sola

이광은 배재고 감독은 스스로에 대해 “A는 받았지만 A+를 받지는 못한 사람”이라고 표현했다. 팀에선 늘 요긴한 선수였어도 태극마크는 달 수 없었던 사나이. 그러나 그는 언제나 팀을 위해 몸을 던지면서 손해를 감수하는 진짜 ‘남자’였다. 이 감독이 선수시절 못지않은 힘찬 기운으로 방망이를 휘두르고 있다. 박화용 기자 inphoto@donga.com 트위터 @seven7sola

70년 청룡기 고교야구 사흘간 41연속이닝 투구
87년 MBC 청룡서 전경기·전이닝·전타석 출장



현역시절 투수-야수-포수 포지션 상관없이 OK!
70년 청룡기 사흘동안 879개 공 뿌려 ‘무쇠팔’

87년엔 몸아파도 매경기 나가고 싶어 좀 쑤셔
전경기·전이닝·전타석 출장 상상못할 대기록
술 마시고도 매일 1000개 스윙·새벽 로드워크

아직 내 머릿속엔 LG…경기 꼼꼼 챙기며 응원


“A는 받았지만 A+를 받지는 못했다”는 남자. 팀에선 모든 포지션을 맡을 수 있는 정말 요긴한 선수였지만, 국가대표 선발 때는 그 포지션의 최고에게 밀렸다. 한국시리즈 결승 홈런 같은 강렬한 인상도 없다. 그러나 굽은 소나무가 선산을 지키듯 이광은(57)은 언제나 팀을 위해 몸을 던졌다. 자신이 해야 할 일이라고 믿으면 손해를 감수했다. 프로 10년간 90홈런 473타점에 타율 0.283을 남기고 선수생활을 마쳤다. 다양한 지도자 경험을 거쳐 프로야구 감독 자리에도 올랐다. 지금은 모교 배재고의 감독으로 제자들을 지도하고 있다.


○1970년 청룡기의 전설로 남은 41연속이닝 투구

1970년 청룡기고교대회에서 배재고는 4강에 들었다. 이광은의 초인적인 연투가 없었더라면 불가능했다. 중앙고와의 승자 준결승에서 연장 13회까지 0-0으로 비긴 뒤 다음날 서스펜디드 경기에서 20회까지 이어 던졌다. 0-4로 패했다. 20분 뒤 대전고와의 패자부활전에 또 등판했다. 1회부터 선발을 구원해 9회까지 완투했다. 4안타만 내주고 1-0 완봉승. 다음날 군산상고전에서 12회까지 또 던졌다. 41연속이닝 투구라는 초인적 기록을 세웠다. “사흘간 879개의 공을 던졌다. 당시 우리 팀 선수가 11명뿐이었다. 하기룡이 부정선수 시비로 등판할 수 없어 3루수였던 내가 던졌다. 신성철 당시 감독이 경기를 포기하자고 했다. 그때나 지금이나 힘들다는 생각은 없었다. 내가 안 되면 우리 팀은 포기라는 생각만 했다.”



연세대에서도 3루수 겸 센터로 뛰면서 팀의 필요에 따라 마운드에 올랐다. 대학을 졸업하고 포항제철 창단 멤버로 입단했다. 월급이 18만원이었다. 팀이 원하면 어디라도 나가는 유틸리티 선수였다. “79년 실업과 대학 선수들이 출신고교별로 출전하는 제1회 야구대제전이 열렸다. 그 때도 하기룡은 등판하지 못했고, 내가 1차전 대전고전에 등판했다. 2차전 중앙고와 경기 때는 신언호가 투수, 내가 포수였다. 그 경기로 모든 포지션을 다 뛰었다.”

성무에 입대해 제대를 앞둔 무렵 프로야구가 탄생했다. 27세 때였다. 고민할 이유가 없었다. MBC 청룡도 A급 대우를 해줬다. 계약금, 연봉 각 2400만원씩이었다. 그 돈으로 서울 봉천동에 23평짜리 아파트를 1800만원에 샀다. “82년 4월 말 제대하고 5월 2일 해태전에 처음 출장했다. 82년 초부터 군에 있으면서 MBC로부터 매달 200만원의 월급을 받았다. 아내 몰래 원 없이 술을 마시고 돈도 썼다.”


○프로 초창기 MBC의 아련한 기억

술을 좋아했고 사람도 좋아했다. 만화가 허영만 화백을 비롯해 많은 이들과 잘 어울렸다. 남자다웠던 그를 좋아하는 사람이 많았다. “술을 잘 먹는다는 소문만 무성했다. 술집을 지정해놓고 언제든지 가서 마시라는 사람도 있었다. 훈련도 열심히 했다. 매일 1000개의 스윙은 거르지 않았다. 새벽 로드워크도 마찬가지였다. 꾸준히 노력하는 스타일이었다. 동계훈련 때면 벤치프레스 등 개인 웨이트트레이닝 장비를 가지고 다녔다.” 1982년 MBC 선수들에게 백인천은 야구의 신이었다. 체력도 기술도 상상 이상이었다. “(백 감독은) 장거리 러닝을 해도 중위권에 들어올 정도로 체력이 좋았다. 타격기술은 말할 것이 없었다. 노림수가 달랐다. 히트앤드런 사인을 낼 때 들어올 공을 예상하고 그 공만 치라고 했다. 다른 공이 들어오면 타자의 잘못이 아니라고 했다. 정말 그 공이 왔다. 전지전능한 도사 같았다. 훈련도 엄청 많이 시켰지만 백 감독의 말이라면 120% 확신하고 따랐다.”


○1982년 애틀랜타 내한경기, 이광은의 마지막 불꽃피칭

1982년 10월 한국프로야구 탄생을 기념해 메이저리그 애틀랜타 브레이브스가 방한 친선경기를 펼쳤다. 당시 메이저리그 통산 최다홈런기록의 행크 애런과 은퇴한 어니 뱅크스, 빌리 윌리엄스 등도 함께 했다. 예정됐던 한국프로올스타와의 경기를 마친 뒤 해프닝이 생겼다. 만찬 자리에서 애런이 한국프로야구를 얕보는 듯한 발언을 했다. 이용일 한국야구위원회(KBO) 사무총장이 “한 경기를 더 하자”고 즉석에서 제안했다. 당시 프로올스타는 박영길 감독이 지휘했다. 이광은은 포항제철에서 함께 야구를 했던 윤동균에게 말했다. “쟤들은 내가 던져야 이길 수 있다. 형이 감독을 설득해달라”고. 경기 전 심판실을 찾았다. “오늘 내가 힘든 상황이 오면 벨트를 만질 테니 잘 봐달라”고 인사했다. 이광은은 완투했다. 바깥으로 빠지는 슬라이더는 심판의 도움으로 모두 스트라이크였다. 4-3으로 이겼다. “그날 피칭으로 어깨가 망가졌다. 이후 마운드에 올라가지 못했다.”


○1983년 KS 패배, 감독 보이콧 파동 등 아쉬움도 많아

백인천∼김동엽(작고)∼어우홍∼배성서 등 MBC 시절 많은 감독을 모셨다. 기쁜 때가 많았지만 아쉬웠던 기억도 남는다. 김동엽 감독과는 악연이었다. 1983년 경기 도중 몸싸움도 했다. 야구를 그만 두려고 했다. 1988년에는 동료들이 신임 배성서 감독을 보이콧하는 바람에 마음고생도 했다. 주장 겸 상조회장으로 바른 말을 했지만 동료들이 감독을 거부하는 투표를 했다. 동료들에 실망해 유니폼을 벗으려고 했다. 시즌 뒤 야구를 그만두고 사업을 한다며 서울 대치동의 아파트를 처분하는 바람에 경제적 손해도 컸다.

1983년 한국시리즈도 불운했다. 1차전에서 이광은에게 날아온 타구 2개가 묘했다. “1회 김성한의 땅볼이 부러진 배트 헤드와 함께 날아왔다. 앞으로 달려들 수 없었다.(결국 실책으로 기록) 5회 김봉연의 타구는 3루 모서리를 맞고 바운드가 죽어버렸다. 내 능력 이상의 공이었다.” 결국 MBC는 1승도 올리지 못하고 해태에 1무4패로 무너졌다.

현역시절의 이광은 감독. 스포츠동아DB

현역시절의 이광은 감독. 스포츠동아DB




○1987년 전 경기·전 이닝·전 타석 출장 투혼

1987년 상상 못할 기록을 세웠다. 108경기에 모두 출전했다. 전 이닝, 전 타석에 출장했다. 그 해 MBC의 3루수 자리는 오직 이광은의 것이었다. “시즌 도중 아프기도 했고 감기에 걸린 적도 있었지만 내색하지 않았다. 한번도 내 자리를 남에게 내주지 않았다. 매일 경기에 나가고 싶어 좀이 쑤실 때였다. 시즌 마지막 롯데전을 앞두고 타율이 딱 3할이었다. 유백만 당시 감독대행이 3할로 끝내자고 했지만 내가 나가겠다고 했다. 결국 4타수 무안타를 쳐서 타율이 0.298로 끝났지만 후회는 없다.” 이광은은 그런 남자였다. 손해를 보더라도 자기 일이라면 책임은 확실하게 졌다. 1990시즌을 앞두고 교통사고를 당했을 때도 기적같이 회복해 할 일을 했다. 1991시즌을 마치고 유니폼을 벗었다. 현역 욕심은 있었지만 팀의 세대교체를 위해 희생했다. 이후 지도자로 많은 선수를 만났다. 이제 환갑도 머지않은 나이. 두 딸도 시집보냈다. 아내와 오순도순 살아야 할 나이지만 선수 합숙소에 지내며 사서 고생을 하고 있다. 아직도 LG를 머릿속에서 지우지 않았다. 후배 조계현의 권유로 올해 LG의 고사에도 참가했다. TV로 친정팀의 경기를 보며 응원하고, 코치시절 모셨던 이광환 감독과도 가끔 만나 술잔을 기울인다. “스스로 결정해왔던 인생에 후회는 없다. 야구만 하다보니 이재에 밝지 못했다. 먹고 살만큼은 벌었다. 아내와 두 사람 사는데 큰 걱정은 없다.”


이광은은?

▲생년월일=1955년 6월 28일
▲출신교=배재고∼연세대(우투우타)
▲프로선수경력=1982년 MBC∼1990년 LG(1991년 시즌 후 은퇴)
▲프로통산성적=10시즌 923경기 3279타수 929안타(타율 0.283) 90홈런 473타점 475득점 119도루
▲프로수상경력=1986년 최다안타 1위, 1987년 득점 1위, 골든글러브 4회(1984년 3루수·1985년 좌익수·1986∼1987년 외야수)


전문기자 marco@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kimjongkeon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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