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건영통신원의 네버엔딩 스토리] 텍사스 사령탑 7년간 611승…무명 선수서 명장 반열에 오르다

입력 2014-01-22 07:0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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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텍사스 레인저스 감독 론 워싱턴

마이너서 10년…빛나지 않은 선수생활
은퇴 후 오클랜드 1루 코치로 능력 인정
2007년 텍사스 감독 첫 시즌은 최하위
이후 2년간 2위…2010년엔 지구 우승
4년 연속 90승…이젠 WS 첫 우승 도전


지난해 12월 28일(한국시간) 추신수의 입단식이 거행된 알링턴 레인저스 볼파크. 텍사스 레인저스 론 워싱턴 감독은 7년 1억3000만달러의 잭팟을 터뜨린 추신수가 등번호 17번이 새겨진 유니폼을 입도록 뒤에서 도와주며 만면에 미소를 지었다. 오프시즌 동안 1루수 프린스 필더와 최고의 리드오프 추신수를 영입해 2014시즌 월드시리즈 우승을 노려볼 만한 전력을 갖췄기 때문이다. 지난 시즌 신시내티 레즈 더스티 베이커 감독에 이어 또다시 흑인 감독과 인연을 이어가게 된 추신수도 몸값에 걸맞은 활약을 펼쳐 반드시 월드시리즈 우승 반지를 차지하겠다는 전의를 불태우고 있다. 과연 워싱턴 감독은 1961년 창단 이후 단 한 번도 월드시리즈 정상에 오르지 못하고 있는 레인저스의 우승 갈증을 씻어줄 수 있을까. 무명 선수의 설움을 딛고 명장 반열에 오른 워싱턴 감독의 야구인생을 살펴본다.


● 눈물 젖은 빵

1952년생인 워싱턴은 18세 때 캔자스시티 로열스와 계약했다. 그야말로 눈물 젖은 빵을 씹으며 마이너리그에서 구슬땀을 흘렸지만 좀처럼 메이저리그 출전 기회는 찾아오지 않았다. 180cm로 다소 작은 키에 74kg밖에 나가지 않는 깡마른 체형인 그는 특출한 점이 없는 평범한 선수였다. 파워는 물론 타격의 정확도도 떨어졌다. 발도 빠르지 않았지만, 유일하게 수비력은 인정받았다. 주 포지션인 유격수는 물론 2루수와 3루수까지 두루 소화해내는 전천후 선수였다. 그러나 마이너리그에서 전전한 10년 동안 2차례나 트레이드될 정도로 확실한 눈도장을 받지 못해 불안한 나날들을 보냈다.


● 반쪽짜리 선수

LA 다저스 소속이던 1977년 9월 로스터 확장 때 콜업돼 처음 빅리그 무대를 밟았다. 주로 대수비 요원으로 나서며 19타수 8안타(0.368)를 기록하며 기여했지만 곧 마이너리그로 강등됐다. 절치부심하며 3년을 기다린 끝에 1981년에서야 다시 메이저리그의 부름을 받았다. 미네소타 트윈스에서 보낸 1986시즌까지가 전성기였다. 최고 시즌은 1982년으로 119경기에 출전해 타율 0.271, 5홈런, 39타점을 기록했다. 그의 주요 역할은 벤치워머. 투수를 바꿀 때 타순을 고려해 야수까지 교체하는 일이 빈번한 내셔널리그와는 달리 트윈스가 아메리칸리그 소속이어서 후보 선수인 워싱턴의 출전 기회는 많지 않았다. 결국 또다시 저니맨 신세가 돼 볼티모어 오리올스(1987년), 클리블랜드 인디언스(1988년), 휴스턴 애스트로스(1989년)를 거쳤다. 현역선수 생활 중 가장 주목받은 순간은 인디언스 소속이던 1988년 5월 29일 밀워키 브루어스전이었다. 상대 선발 오델 존스에게 8회 원아웃까지 노히트노런으로 끌려가던 상황에서 대타로 출전한 워싱턴이 안타를 뽑았다.


● 아트 하우와의 인연

워싱턴이 마지막으로 메이저리그 경기에 나선 것은 애스트로스 소속이던 1989년 7월 8일이다. 그해 워싱턴은 고작 7경기에 출전해 7타수 1안타 4삼진을 기록했다. 성적은 보잘 것 없었지만, 그의 성실함은 아트 하우 감독의 마음을 사로잡기에 충분했다. 은퇴 후 뉴욕 메츠에서 5년간 일하다 1996년 오클랜드 어슬레틱스 1루코치로 영전됐다. 어슬레틱스 사령탑은 바로 하우 감독이었다.

워싱턴이 코치로서 능력을 인정받는 데는 그리 오랜 시간이 필요하지 않았다. 이듬해부터 2006년까지 3루코치 및 내야코치로 어슬레틱스의 중심 역할을 수행했다. 이 기간 그가 집중 조련한 선수는 골드글러브 6회 수상에 빛나는 에릭 차베스와 2004년 아메리칸리그 최우수선수(MVP) 미겔 테하다가 대표적이다. 특히 차베스는 자신이 받은 골드글로브 트로피 중 한 개를 워싱턴에게 건네며 “코치님이 아니었으면 이 트로피를 받는다는 게 불가능했을 것”이라고 고마워했다. 또 ‘머니볼’에 나오는 것처럼 단 한 번도 1루수를 맡아본 적이 없는 스콧 해티버그를 조련시킨 것도 워싱턴이었다.


● 최다승 감독

2006시즌을 마치자마자 성적 부진을 이유로 벅 쇼월터 감독을 해고한 레인저스 구단은 후임자 물색에 나섰다. 쇼월터를 보좌하던 돈 와카마추 벤치코치, 뉴욕 메츠 매니 악타 3루코치, 일본프로야구 니혼햄 파이터스 트레이 힐먼 감독, 레인저스 포수 출신인 존 러셀 등 쟁쟁한 후보들과 경쟁이 펼쳐졌는데 결국 워싱턴에게 지휘봉이 주어졌다.

워싱턴이 사령탑을 맡은 2007년 리빌딩 작업의 여파로 75승을 거둔 레인저스는 아메리칸리그 서부지구 최하위에 그쳤다. 그러나 2008년(79승)과 2009년(87승)에는 LA 에인절스에 이어 2위로 도약했다. 2010년에는 90승을 거두며 마침내 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이뿐만 아니라 디비전시리즈에서 탬파베이 레이스를 3승2패로 제압해 구단 역사상 처음으로 플레이오프 시리즈 승리를 따내는 감격을 누렸다. 여세를 몰아 천적 뉴욕 양키스를 4승2패로 따돌린 레인저스는 팀 창단 이후 첫 월드시리즈 진출이라는 쾌거를 이뤘으나,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에 1승4패로 무릎을 꿇었다.

2011년에도 96승을 올리며 지구 우승을 차지했다. 디트로이트 타이거스를 제압하고 2년 연속 아메리칸리그 정상에 올랐다.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와의 월드시리즈는 명승부였다. 3승2패로 앞선 6차전에서 2차례나 스트라이크 하나만 잡으면 경기를 끝낼 수 있는 상황을 맞고도 통한의 역전패를 당한 레인저스는 결국 7차전마저 내줘 2년 연속 준우승에 만족해야 했다. 2012년 93승, 2013년 91승으로 4년 연속 90승 이상을 기록해 워싱턴 감독의 지도력이 빛났다. 특히 2013년 8월 5일 보비 밸런타인을 제치고 레인저스 구단 최다승의 영예를 안은 워싱턴 감독은 지난 7년간 611승을 거둬 명장 반열에 올라섰다.

흔히 스타플레이어 출신은 명장이 되기 힘들다고 한다. 아무도 알아주지 않는 무명 선수로 마이너리그에서 10년간 인고의 세월을 보낸 워싱턴 감독의 초라한 경력은 빅리그 사령탑이 된 오늘날 오히려 큰 보탬이 되고 있다. 최근 타이거스로 트레이드된 2루수 이언 킨슬러는 “매 경기 투구 하나하나마다 집중하며 열정적으로 지휘하는 스타일”이라며 워싱턴 감독에 대한 존경심을 표시했다.

스포츠동아 미국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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