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건영통신원의 네버엔딩스토리] 통산 755홈런…베이브 루스의 전설을 깬 사나이

입력 2014-04-16 06:40:00
카카오톡 공유하기
프린트
공유하기 닫기

■ 715홈런 40주년 맞은 행크 애런

메이저리그 역대 홈런왕에는 배리 본즈의 이름이 올라 있다. 그러나 많은 야구팬들은 여전히 행크 애런을 진정한 홈런왕이라 생각하며 그에게 경의를 표하고 있다. 지난 9일 미국 애틀랜타의 터너필드에서는 애런의 715호 홈런을 기념하는 축하 행사가 열렸다. 지금으로부터 40년 전 베이브 루스가 보유하고 있던 기록(714홈런)을 깨는 역사적인 홈런을 때린 후 팬들의 열광적인 환호를 받으며 베이스를 도는 애런의 모습은 메이저리그의 찬란한 유산으로 남아 있다. 성실함과 꾸준함으로 한 시대를 풍미하며 홈런왕으로 우뚝 선 애런의 발자취를 살펴본다.


파워·정교함 모두 갖춘 가장 까다로운 타자
1957년 브레이브스의 ‘WS 우승’ 일등공신
ML 최초로 ‘500홈런-3000안타’ 위업 달성
1976년 에인절스전 마지막 홈런…그 해 은퇴

홈런수는 본즈에 잡혔지만 타점 1위는 여전

● 초년 시절 그리고 행운의 넘버 ‘44’


애런은 1934년 2월 5일 앨라배마주 모바일에서 태어났다. 가난한 집안 형편 때문에 어린 시절부터 목화밭에서 고된 노동을 해야 했던 애런은 손수 만든 방망이와 공으로 야구를 하기 시작했다. 오른손잡이임에도 방망이를 잡을 때 왼손을 위로 하는 특이한 폼을 가지고도 엄청난 파워를 과시한 애런은 고등학교 2학년 때부터 니그로리그 팀에서 활약했다. 당시 그에게 주어진 돈은 경기당 10달러. 요즘 시세로 환산하면 91달러로 10만원이 채 되지 않는 금액이었다.

니그로리그에서 독보적인 활약을 보이자 뉴욕 자이언츠와 보스턴 브레이브스가 스카우트 공세를 벌였다. 당초 애런은 윌리 메이스가 속한 자이언츠에서 뛰기를 원했지만 50달러를 더 제시한 브레이브스가 애런을 차지하는 데 성공했다.

1952년은 애런에게 의미 있는 해였다. 브레이브스의 마이너리그에서 뛰며 기량을 차곡차곡 연마하기 시작했다. 방망이도 오른손이 위로 가는 정상적인 그립으로 바꿨다. 타고난 파워에 정교함을 더한 그의 활약은 눈부셨다. 올스타에 선정됐고, 만장일치로 신인왕을 차지했다. 향수병과 인종 차별이 늘 그를 괴롭혔지만 숱한 역경을 딛고 1954년 4월 13일 메이저리그에 데뷔했다. 생애 첫 홈런은 4월 24일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빅 라시를 상대로 터뜨렸다. 그해 9월, 발목이 부러지는 중상을 입은 애런은 백넘버를 5번에서 44번으로 바꿨다. 44번은 그에게 행운의 넘버였다. 한 시즌 44개의 홈런을 4차례나 기록했고, 그에게 715번째 홈런을 허용한 LA 다저스의 투수 앨 다우닝의 백넘버도 44번이었다.


● 최고의 별…21차례나 올스타로 뽑혀

빅리그 2년차인 1955년, 애런은 생애 처음 올스타로 선정됐다. 은퇴할 때까지 그가 올스타로 뽑힌 것은 무려 21차례나 됐다. 올스타전 명단에 애런이 포함되지 않는 것이 이상할 정도로 팬들의 사랑을 꾸준히 받았다. 1956년 타율 0.328로 내셔널리그 타격왕이 된 애런은 이듬해 44홈런과 132타점으로 2관왕에 오르며 MVP까지 거머쥐었다. 이뿐만 아니라 뉴욕 자이언츠와의 월드시리즈에서도 타율 0.393, 3홈런, 7타점으로 맹활약하며 밀워키 브레이브스의 우승을 이끌었다. 1958년에도 브레이브스의 내셔널리그 우승에 앞장섰지만 월드시리즈에서 뉴욕 양키스와 7차전까지 가는 명승부 끝에 준우승에 머물러 2년 연속 우승 반지를 차지하는 데 실패했다.

파워와 정교함을 모두 갖춘 애런은 투수들이 상대하기 꺼려하는 타자였다. 0.355의 타율로 생애 두 번째 타격왕을 차지한 1959년, 애런은 39개의 홈런과 123타점을 올렸다. 1963년에는 트리플 크라운을 거의 달성할 뻔했다. 홈런(44)과 타점(130)에서 1위를 차지했지만 타율(0.319)에서 3위에 그쳐 대기록이 무산됐다. 하지만 도루를 31개나 성공해 한 시즌 30(홈런)-30(도루)을 달성한 3번째 선수로 이름을 올려 아쉬움을 달랬다.


● 500홈런-3000안타 클럽 창시자

연고지를 밀워키에서 애틀랜타로 옮긴 후에도 애런의 활약에는 쉼표가 없었다. 1968년 7월 15일 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의 마이크 매코믹을 상대로 통산 500번째 홈런을 때렸다. 1970년 5월 18일에는 신시내티 레즈전에서 통산 3000 안타의 위업을 달성했다. 500홈런과 3000안타를 동시에 이룬 최초의 선수가 된 것. 1971년 4월 28일에는 역대 3번째로 600홈런 클럽에 가입했고, 그해 올스타전에서는 첫 홈런포를 쏘아 올렸다. 37세의 노장임에도 자신의 한 시즌 최다 홈런 기록(47개)도 수립했지만 정규시즌 MVP(최우수선수) 투표에서는 6번째로 3위에 그쳤다. 늘 엄청난 실력을 과시하고도 상복과는 인연이 없었던 셈이다.

선수들의 파업으로 시즌이 일찌감치 종료된 1972년에는 윌리 메이스를 제치고 역대 홈런 2위로 등극했고, 개인통산 2000타점 고지를 정복했다. 애틀랜타에서 처음으로 열린 올스타전에서 홈런을 때려 홈팬들을 열광시켰다.


● “루스의 기록을 깨지 말라” 살해 위협 받아…마침내 루스를 뛰어넘다

루스의 홈런 기록에 한 발짝씩 다가서자 그의 일거수일투족에 모든 관심이 집중되기 시작했다. 39세이던 1973년 애런은 40개의 홈런을 기록했다. 개인통산 8번째로 40개 이상의 홈런을 때린 것이다. 통산 713개 홈런으로 루스의 기록보다 딱 1개가 부족한 채 시즌을 마감했다. 그해 겨울 애런은 수없이 많은 살해 위협을 받았다. 루스의 기록을 흑인인 애런이 깨서는 안 된다는 인종 차별주의자들의 만행이었다.

1974년 브레이브스는 신시내티 레즈와 원정 3연전으로 시즌을 시작했다. 홈런 신기록이 애틀랜타에서 나오기를 원한 브레이브스 구단은 애런을 출전 명단에서 제외시켰다. 그러나 보위 쿤 커미셔너가 원정 3연전 중 최소 두 경기에는 나올 것을 명령했다. 시즌 첫 번째 타석에서 들어선 애런은 단 한 번의 스윙으로 루스와 어깨를 나란히 했다.

브레이브스의 홈 개막전이 열린 4월 9일, 애틀랜타-풀턴 카운티 스타디움은 입추의 여지가 없을 만큼 수많은 관중들로 채워졌다. 개장 이래 최다인 5만3775명의 관중이 들어 선 가운데 공중파인 NBC가 이 경기를 미 전역으로 중계했다. 애런은 4회말 다저스의 선발 투수 앨 다우닝을 상대로 좌측 담장을 넘기는 홈런포를 터뜨렸다. 좌익수 빌 버크너가 힘껏 치솟아 볼을 잡으려 했지만 무위로 돌아갔다. 역사적인 715번째 홈런볼을 잡은 사람은 브레이브스의 불펜투수 톰 하우스였다. 루스 은퇴 이후 39년간 이어져 온 홈런 기록이 새롭게 수립된 순간이었다.

그해 10월 6일 브레이브스 선수로 733번째 홈런을 때린 애런은 은퇴를 하지 않고 밀워키 브루어스로 팀을 옮겨 선수 생활을 2년 더 연장했다. 그의 755번째 홈런은 1976년 7월 21일 밀워키 카운티 스타디움에서 열린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전에서 나왔다. 애런에게 마지막으로 홈런을 허용한 투수는 딕 드라고였다.


● 홈런왕의 위대한 유산…불멸의 기록 ‘2297타점’

약관 20세이던 1954년에 데뷔한 애런은 1976년까지 23년간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하며 타의 추종을 불허하는 불멸의 기록들을 남겼다. 1999년 ‘스포팅 뉴스’가 선정한 역대 최고의 선수 100명 중 애런은 5위에 랭크됐다. 1955년부터 1973년까지 최소 24개 이상의 홈런을 때리는 꾸준함을 보였고, 30개 이상의 홈런을 기록한 것은 15시즌이나 됐다. 그보다 5살 어린 친동생 토미 애런도 잠시 메이저리그에서 활약했다. 토미는 13개의 홈런을 치는 데 그쳤지만 두 형제의 기록을 합치면 768개나 된다. 이는 조 디마지오, 빈스 디마지오, 돔 디마지오 형제가 합작한 573개를 큰 차이로 제친 것이다.

비록 홈런킹 자리는 약물에 의존한 배리 본즈에게 내줬지만 타점(2297개) 부문에서는 여전히 1위 자리를 지키고 있다. 최다안타 부문에서도 3771개로 피트 로즈와 타이 콥에 이어 3위에 랭크됐다. 2174득점도 베이브 루스와 함께 공동 4위에 올라있다. 1982년 8월 애런은 97.8%의 득표를 얻어 명예의 전당에 입성했다. 1936년 98.2%로 역대 최고를 기록한 타이 콥에 이어 두 번째로 높은 득표율이었다.

스포츠동아 미국 통신원



뉴스스탠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