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건영통신원의 네버엔딩스토리] 선수로 2000안타, 감독으로 2000승…‘양키스 6번’으로 남은 조 토리

입력 2014-05-14 06: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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조 토리. 동아닷컴DB

선수로도 NL MVP·올스타 9차례 등 빅스타
지도자 변신 후 성적부진 3차례 해고 아픔도

1996년 양키스 지휘봉 맡고 12년 장기 집권
매년 플레이오프 진출·월드시리즈 4번 우승

명예의 전당 입성…양키스 6번으로 영구결번


스타플레이어 출신은 명장이 되기 힘들다는 말이 있다. 특히 메이저리그에서는 선수 시절 재능을 꽃피우지 못했지만 감독으로서 탁월한 능력을 발휘하는 사례가 비일비재하다. LA 다저스의 토미 라소다 전 감독이 대표적인 케이스다. 좌완투수였던 그의 현역 시절 메이저리그 통산성적은 0승4패(방어율 6.48)에 불과하지만, 다저스 사령탑으로 1599승을 거두며 1981년과 1988년 월드시리즈 우승을 이끌었다. 라소다와 정반대로는 조 토리 전 감독(사진)을 꼽을 수 있다. 그는 1971년 내셔널리그 MVP를 차지한 것을 비롯해 올스타에 무려 9차례나 선정됐던 스타플레이어 출신이다. 감독으로서는 2326승을 거두며 뉴욕 양키스를 4차례 정상에 올려놓은 최고의 명장으로 인정받고 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선수로서 2000안타 이상을 기록하고, 감독으로서 2000승 이상을 따낸 유일한 인물이다. 지난해 12월 만장일치로 ‘명예의 전당’에 입성하게 된 토리 감독은 오는 6월 28일 정식 멤버가 된다. 또한 8월 24일에는 그의 등번호 6번이 양키스타디움에서 영구결번으로 지정된다. 토리 전 감독의 화려한 야구 인생을 조명한다.


● 멀티플레이어

이탈리아 혈통인 토리는 1940년 브루클린에서 태어났다. 메이저리그 생활을 한 친형 프랭크 토리의 영향을 받아 야구선수가 된 그는 1960년 밀워키 브레이브스에 입단했다. 마이너리그 시절부터 정교한 타격을 앞세워 두각을 나타내 올스타 포수인 델 크랜달의 후계자로 거론된 유망주였다. 이듬해 5월 크랜달이 오른팔을 다치면서 메이저리그로 승격되는 행운이 찾아왔다. 프로선수가 된 지 13개월 만에 빅리그 승격이라는 신화를 이뤄낸 것이다.

1963년부터 4년 연속 내셔널리그 올스타 포수로 선정될 정도로 실력과 인기를 모두 겸비한 그는 특히 1964년 리그 4위인 타율 0.321에 20홈런 109타점을 올렸다. 수비율도 0.995로 내셔널리그 1위를 차지했다. 이듬해에는 올스타전 선발 포수로 출전했고, 골드글러브도 거머쥐었다. 브레이브스가 밀워키를 떠나 애틀랜타로 연고지를 이전한 1966년, 토리는 애틀랜타-풀턴카운티스타디움 개장 첫 홈런의 주인공이 됐다. 하지만 연봉 문제로 구단과 잦은 마찰을 빚은 끝에 1969년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로 트레이드됐다.

카디널스에서는 포수와 3루수를 번갈아 보며 수비 부담이 줄어들자 공격력이 더욱 향상됐다. 1971년은 그에게 최고의 해가 됐다. 타율 0.363, 137타점으로 타격 2관왕에 오르며 최우수선수(MVP)로 선정된 것. 1975년 뉴욕 메츠로 또 다시 둥지를 옮긴 토리는 1977년 5월 해고된 조 프레이저의 후임으로 사령탑을 맡았다. 하지만 그가 감독 겸 선수로 활약한 것은 고작 18일에 불과했다. 감독 역할에 충실하기 위해 화려했던 현역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빅리그 18년 동안 2209경기에 출전한 토리는 타율 0.297, 252홈런, 1185타점의 뛰어난 성적을 남겼다. 3할대 타율과 100타점 이상을 각각 5차례씩, 20홈런 이상은 6차례 기록했다. 또한 내셔널리그 포수 부문 수비율 1위도 2차례 차지했다. 이처럼 공격과 수비에서 모두 탁월한 기량을 발휘했지만 포스트시즌에는 단 한 경기도 출전하지 못하고 선수 생활을 마감했다.


● 친정 팀과의 인연

토리는 현역 시절 자신이 몸담았던 뉴욕 메츠(1977-1981), 애틀랜타 브레이브스(1982-1984),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1990-1995)에서 모두 감독을 역임한 진기록의 소유자다. 그러나 지도자 생활은 그다지 순탄치만은 않았다. 메츠에서는 5년 동안 단 한 차례도 5할 승률을 달성하지 못했다.

브레이브스로 옮긴 첫 해인 1982년 89승73패로 내셔널리그 서부지구 타이틀을 획득했다. 1969년 이후 브레이브스의 첫 포스트시즌 나들이였다. 하지만 카디널스와의 리그 챔피언십시리즈에서 4전 전패로 무릎을 꿇었다. 이듬해에는 88승을 거뒀지만 1경기차로 플레이오프 진출에 실패했다. 1984년 80승82패에 그치자 브레이브스로부터 해고 통보를 받았다.

야인이 된 토리는 1985년부터 6년 동안 캘리포니아 에인절스의 해설자로 활동했다. 포스트시즌에는 ESPN에서 마이크를 잡았는데, 1989년 베이 시리즈(오클랜드 어슬레틱스-샌프란시스코 자이언츠)로 열린 월드시리즈 도중 발생한 로마 프리에타 지진을 캔들스틱파크(샌프란시스코 홈구장) 현장에서 전하기도 했다. 1990년 화이트 허조그를 대신해 카디널스 사령탑으로 복귀한 토리는 351승354패의 기록을 남겼지만 단 한 차례도 포스트시즌에 오르지 못했다. 결국 1995년 6월 성적 부진을 이유로 또 다시 중도하차했다.


● 양키 제국 재건

친정팀에서 세 번이나 해고를 당하는 아픔을 맛본 그에게 손을 내민 구단은 뉴욕 양키스였다. 감독 자르기가 주특기인 조지 스타인브레너 구단주에 의해 발탁된 그는 12년(1996∼2007년)이나 양키스의 지휘봉을 잡으며 1173승767패(승률 0.605)의 놀라운 성적을 거뒀다. 이 기간 동안 양키스는 매년 플레이오프에 진출했고, 4차례나 월드시리즈 우승을 차지했다.

부임 첫 해인 1996년 부진한 성적으로 출발하자 극성맞은 뉴욕 언론들은 그를 집중 성토했다. 한 신문사는 1면 헤드라인 제목으로 ‘답이 없는 조(Clueless Joe)’라 붙이기도 했다. 하지만 루키였던 데릭 지터와 2년차인 앤디 페티트와 마리아노 리베라 등의 기량이 향상되면서 반전 드라마가 펼쳐졌다. 플레이오프에 진출해 텍사스 레인저스와 볼티모어 오리올스를 물리치고 월드시리즈에 올라 애틀랜타 브레이브스를 4승2패로 제압했다. 1981년 이후 양키스의 첫 우승을 이끈 토리는 아메리칸리그 감독상도 차지했다.

1998년부터 2000년까지 월드시리즈 3년 연속 우승의 신화를 남긴 토리 군단은 ‘왕조(Dynasty)’라 불려졌다. 하지만 4년 연속 우승에 도전한 2001년 월드시리즈에서 애리조나 디백스에게 3승4패로 무릎을 꿇으며 양키스의 전성시대는 서서히 내리막을 타기 시작했다. 2002년 최고 승률을 올리고도 애너하임 에인절스에게 디비전시리즈에서 무릎을 꿇었고, 이듬해에는 월드시리즈에 진출했지만 플로리다 말린스에게 덜미를 잡혔다. 2004년에는 숙적 보스턴 레드삭스와의 아메리칸리그 챔피언십시리즈에서 3연승을 거둔 후 4연패를 당하는 ‘리버스 스윕’의 불운을 맛봤다. 2005년부터 3년 연속 디비전시리즈에서 탈락하자 토리 감독은 자의 반 타의 반으로 양키스와 결별을 선택했다.


● 마지막 불꽃

토리 감독과 양키스의 사이가 틀어지자 내셔널리그 최고 명문구단 중의 하나인 LA 다저스가 그 틈새를 파고들었다. 2007년 11월 2일, 다저스는 신임 감독으로 토리를 영입한다고 전격 발표했다. 1988년 이후 우승 갈증에 목말라 있던 LA 팬들은 쌍수를 들고 환영했다. 토리 감독이 이끄는 다저스는 2008년과 2009년 내셔널리그 챔피언십시리즈까지 진출해 기대에 부응했다. 그러나 두 번 모두 필라델피아 필리스의 벽에 막혀 월드시리즈 진출에는 실패했다. 2010년 80승을 거두며 5할 승률에도 미치지 못하자 토리 감독은 사임을 결심했다. 10월 4일 시즌 마지막 경기에서 애리조나 디백스를 3-1로 물리친 것이 토리 감독의 2326번째이자 마지막 승리였다. 일선에서 물러난 토리 전 감독은 2011년부터 버그 셀리그 커미셔너를 돕는 메이저리그 사무국 수석 부사장으로 임명됐다. 2012년 봄에는 다저스 구단 매입에 뛰어들었으나 뜻을 이루지 못했다. 2013년에는 월드베이스볼클래식에서 미국대표팀의 감독을 맡았지만 도미니카 공화국과 푸에르토리코에 밀려 챔피언십라운드에 진출하지 못하고 6위로 대회를 마감했다.

스포츠동아 미국 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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