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손건영통신원의 네버엔딩스토리] 트리플 크라운 2회에 빛나는 20세기 최후의 4할 타자

입력 2014-06-05 06:4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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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위대한 타자’ 테드 윌리엄스

1939년 보스턴 데뷔 첫 해부터 AL 타점왕
빅리그 3년차 시즌 마지막 경기서 4할 달성

AL MVP 2회·올스타 19회 등 불멸의 스타
라이벌 양키스 팬들마저 고의4구에 야유

한국전 참전 등 공백 후 바로 타격왕 복귀
은퇴 경기서 홈런도…2002년 83세로 운명

SK 와이번스의 이재원이 올 시즌 4할이 넘는 맹타를 휘두르고 있다. 한국프로야구에서 4할대 타율로 시즌을 마친 것은 MBC 백인천이 프로야구 출범 원년인 1982년 우리나이로 40세에 0.412를 기록한 것이 처음이자 마지막이다. 메이저리그에서는 1941년 보스턴 레드삭스의 테드 윌리엄스가 0.406를 기록한 것을 끝으로 더 이상 4할대 타자가 나오지 않고 있다. 빅리그 역사상 가장 위대한 타자라 칭송 받았던 윌리엄스는 아메리칸리그 MVP(최우수선수) 2차례, 올스타전 출전 19차례, 타격 트리플 크라운 2차례, 아메리칸리그 타격왕 6차례, 타점왕과 홈런왕을 각각 4차례씩 차지한 불멸의 스타였다.


● 마지막 4할 타자


윌리엄스는 루키 시즌인 1939년 145타점을 올려 아메리칸리그 1위를 차지했다. 2년 연속 3할대 타율을 기록하며 놀라운 재능을 보인 윌리엄스는 빅리그 3년째인 1941년 8월말까지 타율 0.402를 마크했다. 동료들은 물론 팬들의 성원이 대단했다. 심지어 뉴욕 양키스 팬들마저 레드삭스전에서 투수 레프티 고메즈가 볼넷으로 윌리엄스를 거르자 야유를 보낼 정도였다.

한동안 0.413까지 올랐던 타율은 정규시즌 마지막 경기를 앞두고 0.39955까지 내려갔다. 반올림을 하면 정확히 4할이 되지만 윌리엄스는 경기에 출전하지 말라는 주위의 제안을 뿌리치고 도전을 선택했다. 필라델피아 애슬레틱스와의 더블헤더에서 8타수 6안타를 때려 0.406으로 시즌을 마감했다. 당시는 희생플라이를 쳤을 경우도 타수로 기록되던 시절이었다. 지금으로 치면 0.416의 놀라운 타율을 올린 것이다.


● 트리플 크라운

타율, 홈런, 타점 부문에서 모두 1위를 차지하는 트리플 크라운은 타자로서 최고의 영예라 할 수 있다. 윌리엄스는 평생 한 번 하기도 힘든 트리플 크라운을 두 차례(1942년, 1947년)나 달성했다. 메이저리그 역사상 트리플 크라운은 총 17차례밖에 나오지 않았다. 그 중 두 차례나 이 기록을 수립한 것은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의 로저스 혼스비(1922년, 1925년)와 윌리엄스뿐이다.

1942년 0.356을 기록해 2년 연속 타격왕에 오른 윌리엄스는 36홈런과 137타점으로 아메리칸리그 1위를 휩쓸었다. 하지만 4할 타율을 기록한 1941년과 트리플 크라운을 달성한 1942년 모두 MVP 수상에 실패했다.

제2차 세계대전 참전 때문에 1943년부터 3년 동안 공백이 있었음에도 윌리엄스는 복귀 첫 해인 1946년 0.342, 38홈런, 123타점으로 3개 부문 모두 아메리칸리그 2위를 차지하며 팀을 월드시리즈에 진출시켜 생애 처음 MVP로 뽑히는 기쁨을 누렸다. 이듬해에는 0.343, 32홈런, 114타점으로 3관왕을 차지해 천재성을 과시했지만 양키스의 조 디마지오에게 단 1표차로 밀려 2년 연속 MVP 수상에는 실패했다.


● 유일한 월드시리즈

라이벌 양키스에 늘 밀려 이렇다 할 성적을 내지 못하던 보스턴 레드삭스는 1946년 마침내 월드시리즈에 진출했다. 그해 9월 13일 레드삭스는 클리블랜드 인디언스를 1-0으로 제압하고 페넌트레이스 우승을 일찌감치 확정지었다. 그 경기에서 유일한 득점은 윌리엄스의 인사이드파크 홈런이었다.

하지만 월드시리즈를 앞두고 컨디션 조절을 위해 가진 시범경기에서 사달이 났다. 올스타팀 멤버인 워싱턴 세너터스의 미키 해프너가 던진 공에 팔꿈치를 강타당한 것. 통증을 참고 나선 월드시리즈에서 윌리엄스는 세인트루이스 카디널스를 상대로 홈런 없이 25타수 5안타, 1타점으로 부진을 면치 못했다. 특히 7차전에서 4타수 무안타로 물러나 우승의 꿈을 이루지 못했다.


● 한국전쟁 참전

더글러스 맥아더 장군을 우상으로 여겼던 윌리엄스는 한국전에 전투기 조종사로 참전해 1952년 6경기, 1953년 37경기 출전에 그쳤다. 훗날 그가 40세가 되던 해 맥아더 장군은 자신의 초상화와 함께 ‘가장 위대한 타자일 뿐만 아니라, 조국을 위해 자신을 희생한 위대한 친구’라는 글귀를 친필로 써서 선물했을 정도로 두터운 친분을 과시했다.

윌리엄스가 제2차 세계 대전과 한국전쟁에 참전하느라 생긴 5년에 가까운 공백이 없었더라면 훨씬 더 뛰어난 성적을 올렸을 것이다. 공백이라는 말은 윌리엄스의 경기력과 무관했다. 1954년 0.345로 생애 5번째 타격왕을 차지하며 화려한 복귀식을 했다. 1957년에는 0.388, 40세가 된 1958년에도 0.328로 2년 연속 타격왕에 올랐다. 그의 마지막 타석도 한 편의 드라마였다. 은퇴 경기로 치러진 1960년 9월 28일 마지막 타석에서 홈런을 때렸기 때문이다.


● 정교함과 파워를 겸비한 타자

윌리엄스의 통산 성적은 타율 0.344, 521홈런, 2654안타, 1839타점. 또한 그를 위대하게 만드는 놀라운 기록은 출루율로, 무려 0.482나 된다. 윌리엄스는 1966년 명예의 전당에 입회했다.

다른 슬러거와는 달리 윌리엄스는 가벼운 배트를 선호했다. 스윙 스피드를 빠르게 하기 위함이었다. 한번은 한 배트 제조 회사가 34온스(약 964g)짜리 배트 3개와 33.5온스(약 950g)짜리 배트 한 개 등 총 4개의 배트를 건네며 어느 것이 더 가벼운지 구별하라는 주문을 하자 단번에 맞췄다는 일화가 있을 정도로 그는 배트 무게에 매우 민감했다. 늘 배트를 신주단지 모시듯 귀하게 여긴 그는 동료들에게 배트를 그라운드에 방치하지 말라고 충고를 하기도 했다. 땅의 습기 때문에 방망이가 무거워질 수 있기 때문이었다.

타격에 관한 한 거의 완벽에 가까운 그였지만 한 가지 단점이 있었다. 바로 발이 느리다는 점으로 인사이드파크 홈런과 사이클링 히트를 각각 1회씩밖에 기록하지 못했다. 19년 경력에서 기록한 도루는 고작 24개뿐이었다. 걸음만 빨랐다면 최소 1번 이상 4할대 타율을 더 달성했을 것이라는 게 중론이다.

윌리엄스는 1969년 워싱턴 세너터스의 감독으로 부임해 연고지를 텍사스로 옮긴 1972년까지 4년간 지휘봉을 잡았다. 하지만 부임 첫 해 86승76패를 기록하며 ‘올해의 감독상’을 받았지만 이후 이렇다할 성적을 내지 못했다. 노년에 심장병을 앓았던 윌리엄스는 2002년 7월 5일 83세를 일기로 세상을 떠났다.

스포츠동아 미국통신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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