정지현이 30일 인천 도원체육관에서 열린 2014인천아시안게임 레슬링 남자 그레코로만형 71kg급 결승에서 딜쇼존 투르디에프(우즈베키스탄)를 테크니컬 폴승(9-0)으로 누르고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10년 만에 다시 메이저대회 타이틀을 거머쥔 정지현이 태극기를 펼쳐 들고 매트를 돌고 있다. 오른쪽 사진은 시상식 후 가족을 만나 부인에게 금메달을 걸어준 모습. 인천|임민환 기자 minani84@donga.com 트위터 @minani84
아내와의 올림픽 금 약속은 아테네서 지켰지만
광저우 은·런던올림픽의 좌절이 미안했던 남편
멍든 눈으로 테크니컬 폴 10년만에 메이저 우승
“아이들과의 약속 지켜 너무 기쁘다” 행복한 미소
“아빠, 더 세게 밀어.” 관중석의 두 살 난 아들(우현)은 레슬링 올림픽 챔피언 출신인 아빠 정지현(31·울산남구청)의 피를 그대로 물려받은 것처럼 보였다. 난간만 보면 타고 오르려는 모습이 예사롭지 않았다. 그러나 아내 정지연(32) 씨는 “오늘로서 결심했다. 아들은 절대로 이 운동을 시키지 않을 것”이라며 고개를 가로저었다. 이미 4강전에서 정지현의 몸은 만신창이가 됐다. 2010광저우아시안게임 금메달리스트 사에이드 압드발리(이란)는 정지현을 수차례 머리로 들이받았다. 눈 주위는 피멍이 들어 퉁퉁 부었다. 아내의 마음은 타들어갔다. “가족에게 중요한 건 금메달이 아니잖아요. 도저히 못 보겠어요. 그저 안 다치기만을….”
● 아내의 바람대로 퍼펙트 금!
가족의 간절한 바람은 매트에 닿았다. 정지현은 30일 도원체육관에서 열린 2014인천아시안게임 레슬링 남자 그레코로만형 71kg급 결승에서 딜쇼존 투르디에프(우즈베키스탄)를 9-0 테크니컬 폴승으로 꺾고 아시아 정상에 섰다. 결승에선 가족의 뜻대로 어디 한군데 더 다친 곳 없이 완승을 거뒀고, 국민들의 기대대로 금메달을 목에 걸었다. 이로써 정지현은 2004아테네올림픽 금메달 이후 10년 만에 다시 메이저대회 챔피언에 등극했다. 광저우아시안게임에서 은메달에 그쳤던 아쉬움도 말끔히 씻었다. 한국레슬링으로서도 2006도하대회 이후 8년 만에 아시안게임 레슬링 금맥을 다시 잇는 순간이었다.
● “내 꿈은 세계챔피언!” 첫 만남의 약속 지킨 남자
아내는 2003년 남편과 처음 만났던 순간을 떠올렸다. 둘은 정지현의 중학교 은사 결혼식장에서 인연을 맺었다. 우연히 같은 테이블에 앉았는데, 아내는 새우껍질을 잘 벗겨내지 못하는 정지현이 안쓰러워 살짝 도움을 줬다. ‘여성스러운 모습에’ 정지현은 이상형임을 직감했다. 그렇게 데이트 신청을 했다. 그러나 만 20세의 레슬러는 과묵한 성격이라 말수가 적었다. 침묵을 깨고 그가 보여준 것은 핸드폰 액정화면이었다. 그곳엔 “내 꿈은 세계챔피언”이라고 적혀 있었다. 1년 뒤 정지현은 아테네올림픽에서 정상에 서며 그 약속을 지켰다. 무명의 선수는 일순간 한국레슬링을 대표하는 스타가 됐다. 둘은 6년간 반석 같은 사랑을 지키며 2009년 백년가약을 맺었다.
● 태릉 외출 시간에도 아이들 옷 챙겨…금메달 아니어도 일등 아빠
정지현이 광저우아시안게임과 2012런던올림픽을 준비 하는 동안 아내의 뱃속에는 새 생명이 움트고 있었다. 그 때마다 ‘아금(아시안게임 금메달)’, ‘올금(올림픽 금메달)’이란 태명을 지었다. 그러나 2번 모두 그 바람은 이뤄지지 않았다. 정지현은 종종 “가족과의 약속을 지키지 못해 미안하다”고 되뇌었다. 그때마다 아내는 고개를 가로저었다. “언제나 일등 남편, 일등 아빠에요. 저희 집이 태릉선수촌 근처거든요. 통화 중에 ‘아이들 가을 옷이 없다’고 말하면, 잠시 받은 외출시간에도 애들 옷을 사가지고 오는 아빠랍니다.” 이제 30대에 접어든 정지현은 피로감을 많이 느낀다. 외박을 나오면 단잠을 자기도 모자란 시간이다. 하지만 그때마다 두 아이는 아빠를 가만히 내버려 두지 않는다. 그래도 손사래 한번 쳐본 적이 없는 아빠다. 아내는 “너무나 자상해서 내겐 과분한 남편”이라며 미소를 지었다.
● ‘아금이’ 서현, ‘올금이’ 우현과의 약속 지켜
금메달 기자회견을 마친 뒤 정지현은 아내와 두 아이에게 달려갔다. 아금이 서현(3)과 올금이 우현은 어느새 훌쩍 자라 아빠의 품에 안겼다. “태극기를 들고 매트를 도는데 하늘로 솟을 것 같은 기분이었어요. 이제야 아이들과의 약속을 지킬 수 있어 너무 기쁩니다.” 퉁퉁 부은 두 눈 사이로 퍼지는 가느다란 미소가 '아빠의 행복'을 말하고 있었다.
인천|전영희 기자 setupman@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트위터 @setupman1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