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타 타임라인] 박근형 “일흔 여섯에 만난 액션 히어로…배우 인생 최고의 행복”

입력 2016-09-02 06:57: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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역사는 승자의 기록. 배우 박근형은 60년 넘게 연기 인생을 살아가고 있다. 셀 수 없이 많은 드라마와 영화에 출연하며 지금도 열정을 과시한다. 체력이 뒷받침돼야 가능한 연극도 거뜬히 해냈다. 노년에도 지치지 않고 건재함을 과시하는 그가 진정한 승자다.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 60년 연기 인생 박 근 형

명멸하는 수많은 별들 가운데서 유난히 반짝였던, 그래서 오랜 세월의 흐름 속에서도 또렷하게 추억되는 별들이 있다. 안방극장과 스크린, 무대 위에서 당대 대중과 함께 교감했던 이들. 스포츠동아가 그 반짝인 별들의 자취를 새롭게 조명한다. 그들의 지나온 삶, 못 다한 이야기들, 거기 담긴 짧지 않은 시간의 흐름과 여정을 따라가며 추억하는 것은 또 하나의 아름다운 시절에 대한 기록이 될 것이라 기대한다.


17세때 연극바람…연기에만 미쳤던 30대
돌이켜보면 무모할 정도로 용감했던 시기

지금껏 나를 살아가게 한 힘은 욕심과 도전
영화 ‘그랜드 파더’ 위해 버스면허증도 땄죠

아들 이어 손자도 연기…아내는 나의 전부
마지막 꿈은 고향에 ‘연극 서당’ 세우는 일


60년 동안 한 길을 걸어온 사람의 일대기는 그 자체로 역사가 된다. 팔순을 앞둔 노배우이지만 지칠 새 없는 도전을 계속하는 배우 박근형(76)이 보낸 시간도 그렇게 켜켜이 쌓여왔다. “누구도 나를 찾지 않을 때, 조용히 사라지는 것이 내게는 은퇴”라고 말하는 그는 “나이 듦이 나를 불안하게 해도, 배우로서 욕망은 끝이 없다”고 했다. 폭염을 견디며 8월 중순까지 한 달간 연극 ‘아버지’로 무대에 오른 박근형이 영화 ‘그랜드 파더’로 다시 관객을 찾았다. 영화는 베트남전 참전 ‘노병’이 손녀를 지키려 벌이는 처절한 응징의 드라마다. 노배우의 진가가 드러나는 무대다.


● 연극에 빠진 17살 ‘소년’

요즘은 연기자를 꿈꾸는 10대가 흔하지만 1950 년대 중반, 전후의 혼란기에 무대에 서기로 결심한 고등학생은 흔하지 않았다. 연극배우를 ‘굿쟁이’라 폄훼하던 시절이다. 박근형은 “17살 때 연극 바람이 제대로 들었다”고 돌이켰다.

전라북도 정읍에서 유복한 집안의 5남매 중 둘째로 태어난 박근형의 꿈은 의사였다. “편찮은 아버지의 병을 고치기 위해” 공부에 매달렸고, 성적도 뛰어났다. 서울서 공부하겠다는 아들을 아버지는 뒷바라지했다. 박근형은 그렇게 명문인 휘문고에 입학했다. “1학년 가을 유치진 선생의 이름을 딴 전국연극대회가 열렸다. ‘사육신’이란 작품으로 참가했다. 고교 3년 선배인 임영웅 선생과 함께 준비하면서 소위 연극 바람이 시작된 거다.”

내리 3년을 연극에 쏟아 부었다. 공부는 뒷전이 됐다. 대학교 입시철이 되니 앞이 막막했다. 대학 대신 충무로 한국배우전문학원에 등록해 1년간 연기 이론을 익혔다. 마침 중앙대에 연극학과가 신설되자 응시해 합격했다. 1959년의 일이다. “그렇게 불효막심한 아들이 됐다. 돌아가시기 전까지 아버지께 용돈 한 번 드리지 못했다. 지금도 가슴이 미어진다. 연극하던 무명 시절엔 어머님이 시골에서 싸온 김치와 쌀로 하루하루를 버텼다.”


● 1969년 ‘프리랜서’ 선언

박근형이 연극을 거쳐 드라마에 출연하기 시작한 1960년대는 방송사가 배우들에게 엄격한 소속사였다. 박근형은 1963년 KBS 공채 탤런트로 데뷔했지만, 1969년 ‘프리랜서’를 선언했다.

“오직 좋은 작품만 따르고 싶던 때였다. 다른 방송국이 만드는 특집극에 꼭 출연하고 싶었다. 하지만 프리랜서 선언으로 경제적인 타격이 시작됐다.” 연기하며 맞은 슬럼프였다. “다른 배우들은 연속극을 소화하면서 경제적으로 안정됐지만 나는 작품성만 고집하며 단만극을 주로 했다. 혼자 만족했고, 하고 싶은 대로 했다.”

배우로 인정받아도 경제력은 모자란 가장이었다. 그런 박근형을 보다 못해 ‘쓴소리’를 쏟아낸 이들은 반효정, 김영애 같은 동료 여배우들이다. “왜 작품성만 따지냐고, 일단 집안을 안심시킨 뒤 하고 싶은 연기를 하라더라. 정신이 들었다. 그제야 연속극을 시작했다. 37살이었다.”

1970년대 박근형은 한 해에 7∼8편의 드라마를 소화했다. 영화 출연도 왕성했다. 지금도 자주 거론되는 김수현 작가의 드라마 ‘청춘의 덫’에 출연한 때도 그 무렵이다. “안주하지 않고 내던져야 한다는 생각”으로 보낸 시간이다. “위태롭고 한 치 앞도 모르던, 무모할 정도로 용감했던 때”이기도 했다.

‘도전’은 현재 진행

박근형은 “지금껏 나를 살아가게 한 힘은 도전”이라고 했다. 멈추지 않은 그의 도전은 최근 한국영화의 소재를 넓히는 데도 일조한다. 지난해 출연한 ‘장수상회’에서 노년의 사랑을 뭉클하게 그렸고, 이번 영화 ‘그랜드 파더’에서는 액션 연기를 펼친다.

박근형은 영화를 위해 한 달 동안 근육을 집중적으로 키웠다. 연기에 필요해 버스 운전면허까지 땄다. 무더위 속 촬영 탓에 두 차례나 응급실에 실려 가면서도 버텼다. “찾아오기 어려운 기회이고 크나큰 행복”이라고 여겼기 때문이다. “죽다시피 했지만 용케 살았다”는 그는 “신구, 이순재 선생이 아닌 내게 제안이 와서 얼마나 다행인지 모른다”며 웃었다.

2000년대 들어 주춤했지만 사실 박근형은 한국영화사와 함께 한 배우다. 1974년 영화 ‘이중섭’으로 대종상 남우주연상을 받았고, 1991년 ‘누가 용의 발톱을 보았는가’를 통해 사회상을 비판하기도 했다. “획일주의 탓에 자유로운 의사소통을 할 수 없던 과거 영화 현장”과 비교해 “사회를 마음껏 비판할 수 있는 지금”은 상당히 만족스럽다.

연극 또한 그의 향수를 자극하는 무대. 얼마 전 ‘아버지’를 소화한 직후 그는 “1년에 연극 한 편씩 하겠다”는 약속도 자신에게 했다.

가족 그리고 아내

널리 알려지지 않았지만 박근형은 ‘3대 연기자’ 가족이다. 슬하에 2남1녀를 둔 그의 막내아들은 영화 ‘카트’ 등에 출연한 연기자 윤상훈. 올해 초엔 큰손자가 대학 연극영화과에 진학했다. 3대가 대학로 소극장에서 연극을 보는 일도 익숙하다.

그는 연기를 하겠다는 아들의 뜻을 당초엔 받아들이지 않았다. “유학까지 한 막내아들이 느닷없이 연기를 한다니, 반목도 심했다”고 했다. 하지만 손자가 연기를 한다고 했을 땐 “좋아서 그저 웃음이 났다”고 했다.

박근형의 아내 사랑은 유명하다. 아내와 주고받은 문자메시지가 한 방송을 통해 공개됐을 때 다정한 문구와 더불어 하트 모양 이모티콘이 시청자의 눈에 띄면서 ‘애처가’로 인정받았다. 아내가 과거 위암으로 투병하면서 부부는 더욱 애틋해졌다. 박근형은 “아내 없이 살 수 없다”는 말도 자주 꺼낸다.

노배우에게 ‘나이 듦’이란…

그는 “세상에 100개의 배역이 있다면 배우는 그 100개를 전부 해야 한다”는 철학을 지니고 있다. 그는 “배우의 욕망은 끝이 없다”고 했다.

그런 박근형에게 나이 듦은 어떤 의미일까. “불안함이다. 쓰임새가 줄어드니까. 동년의 많은 친구들이 연기를 포기했고, 지금은 겨우 몇 명 남았다. 다시 태어나면? 배우는 하지 않겠다. 난데없이 주저앉는 직업 같다. 스스로 세상을 떠난 이도 많다. 언제 나를 찾아줄지 기다리는 외로운 직업이다.”

기회 있을 때마다 후배들에 건네는 조언은 ‘독서’ 그리고 ‘연습’이다. “바지 뒷주머니에 대본을 꽂은 후배들의 모습은 정말 보기 싫다. 연기를 못해 다른 배우를 불편하게 하면 그건 횡포다. 연기는 공동의 작업이기에 쉼 없이 단련해야 한다.”


● 남은 ‘꿈’

박근형이 꾸는 꿈은 더 있다. 상대적으로 문화 혜택이 적은 고향 정읍에 ‘연극 서당’을 만드는 일이다. 초등학생과 중학생들이 방학 때마다 모여 연극을 함께 완성하고 그 과정에서 자신의 적성을 찾아가도록 도울 방법을 찾고 있다. 곧 구체화할 계획이라고 했다. “옛날 서당의 분위기처럼, 내가 훈장 선생이 되는 거다. 친근하게 아이들과 연기, 연극을 만들어보고 싶다.”

고향에 작은 극단을 설립하겠다며 이미 ‘극단 굿’이라는 이름까지 정해두기도 한 그는 “주민에게 연극을 소개하고, 가능하다면 주부들과 함께 공연을 만들어보면 어떨까” 되묻는다.

지치지 않고 말을 이어가는 이 배우에게 ‘은퇴’는 없어 보였다.

배우 박근형. 김종원 기자 won@donga.com



● 배우 박근형

▲1940년 6월7일 태생 ▲1963년 KBS 공채 탤런트 데뷔 ▲1968년 제5회 동아연극상 연기상 ▲1968년 ‘지하실의 칠인’으로 영화 데뷔 ▲1974년 제13회 대종상영화상 남우주연상 수상 (영화 ‘이중섭’) ▲1978년 MBC 주말드라마 ‘청춘의 덫’ 주연 ▲1981년 영화 ‘별들의 고향3’ 주연 ▲1991년 MBC 드라마 ‘여명의 눈동자’ 주연 ▲1995년 SBS 드라마 ‘모래시계’ 출연 ▲1996년 SBS 연기대상 수상 (드라마 ‘형제의 강’) ▲2012년 SBS 드라마 ‘추적자’ 주연 ▲2016년 제20회 부천국제판타스틱영화제 남우주연상 수상 (영화 ‘그랜드파더’)

이해리 기자 gofl1024@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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