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타임트랙] WBC, 한국야구 영광의 역사

입력 2016-09-06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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사진=ⓒGettyimages이매진스

한국야구 역사는 2006년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WBC) 이전과 이후로 명확히 나뉜다. 이전까지 한국야구는 국제무대에서 메이저리그 더블A 수준으로 평가됐다. 2005년까지 야구는 축구와 달리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국제대회에 참가하지 않으면서 각 리그, 각 국가의 실력을 겨뤄볼 기회가 극히 제한적이었다. 일본 역시 자국 리그를 위해 올림픽에만, 그것도 해외파가 제외된 국가대표팀을 파견했다. 메이저리그는 한술 더 떠 올림픽에 마이너리그 선발팀을 보냈다.

WBC의 시작은 이제 야구도 축구처럼 국가의 자존심을 건 A매치가 4년마다 열린다는 의미였다. 2006년 제1회 대회를 앞두고 한국은 김인식 당시 한화 감독이 지휘봉을 잡고 박찬호(샌디에이고·이하 당시 소속팀), 서재응(LA 다저스), 봉중근(신시내티), 김선우(콜로라도), 김병현(콜로라도), 최희섭(보스턴)에 일본 요미우리 이승엽까지 합류해 최고의 전력으로 대표팀을 꾸렸다.

이승엽이 1~2라운드에서 연이어 홈런포를 날리고 최희섭의 대타3점포, 마무리 투수로 변신한 박찬호의 활약 속에 한국은 1~2라운드 6전 전승, 특히 숙적 일본에 2승, 세계최강 미국에 1승을 거뒀다. 준결승에서 일본에 0-6으로 패했지만 세계 최고 선수들이 모인 무대에서 더블A 수준으로 평가됐던 한국이 4강에 오르자 세계는 놀랐고, 한국은 감격했다. 대표팀 선수들은 병역특례 혜택을 받았다.

2006년 제1회 월드베이스볼클래식 당시 이승엽. 사진=ⓒGettyimages이매진스


2009년 제2회 대회는 감독 선임과 선수선발부터 난항을 겪었다. 이승엽, 김동주가 함께하지 못했고, 부상도 이어졌다. 김병현의 여권분실 해프닝도 있었다. 추신수는 클리블랜드의 까다로운 차출 조건 속에 어렵게 함께했다.

그러나 봉중근(LG)이 마운드에서 맹활약하고 김태균, 이범호(한화)의 폭발이 이어지며 또 한번 4강에 진출했다. 윤석민(KIA)이 메이저리그 선수들이 즐비한 베네수엘라와 준결승에서 호투하며 결승에 진출해 세계를 놀라게 했다. 결승에서 일본과 연장 10회 혈투 끝에 패했지만 한국야구가 세계무대에서 환하게 빛나는 순간이었다

2013년 제3회 대회에서 한국은 류중일 감독이 사령탑에 올랐다. 그러나 메이저리그에 진출한 대표팀 에이스 류현진(LA 다저스)이 불참하고 추신수마저 신시내티로 트레이드됐다며 소집에 응하지 않으면서 분위기가 달라졌다. 결국 1라운드 첫 경기에서 네덜란드에 0-5로 패해 1라운드 탈락이라는 수모를 당했다.


그해 탈락은 큰 충격이었지만 1·2회 WBC를 통해 한국야구는 세계 정상권과 어깨를 나란히 할 수 있었다. 이후 KBO리그 선수들도 국제무대에서 큰 주목을 받기 시작했다. 국내에서 KBO리그의 인기는 가파르게 상승했고, 제9구단, 제10구단의 창단으로 이어졌다.

이경호 기자 rush@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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