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주말기획] 한강·집앞·휴게소…기상천외 FA계약 장소들

입력 2016-11-11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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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11년 1월 어느 날 늦은 밤. 쌀쌀한 날씨 탓에 한강 둔치에는 인적이 드물었다. 차량 두 대가 짧은 간격을 두고 텅 빈 주차장에 들어섰다. 잠시 후 한쪽 차에 타고 있던 건장한 사내 둘이 다른 쪽 차에 올라탔다. 그리고 꽤 오랜 시간이 흐른 후 차는 다시 다른 방향으로 출발했다. 얼마 후인 1월 27일, KIA는 ‘이범호가 일본 소프트뱅크에서 퇴단하고 KIA에 입단한다’고 전격적으로 발표했다. 당시 이 계약을 주도한 김조호 전 KIA 단장은 “1월 20일 한화와 소프트뱅크의 협상이 결렬됐다는 것을 확인한 후 중심타선과 수비보강을 위해 이범호와 접촉했다. 극도의 보안이 필요한 협상이었기 때문에 늦은 밤 한강 둔치에서 만나 협상을 완료했다”고 털어놨다.

이범호는 2009시즌을 마치고 프리에이전트(FA) 자격으로 일본 소프트뱅크와 계약했지만 코칭스태프가 제대로 된 기회를 보장하지 않아 2010시즌 말부터 퇴단이 거론됐었다. 소프트뱅크가 이범호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는 순간, 사실상 FA 신분이 되기 때문에 국내 구단과 소프트뱅크, 그리고 이범호 간의 협상이 오갔다. 1월 20일 한화와 협상이 최종 결렬됐고, KIA가 극적으로 이범호와 계약서에 사인을 한 것이다. ‘한강 둔치작전’으로 영입된 이범호는 KIA의 믿음직한 캡틴으로 지금까지 맹활약하고 있다.

FA 계약은 007작전과 같다. 호텔 비지니스룸이나 구단 대회의실에서 만년필로 서로 사인을 하고 활짝 웃으며 악수를 주고받는 경우도 많지만 구단간 치열한 경쟁 속에 첩보영화를 방불케 하는 장면이 종종 연출됐다.

원소속구단과 우선협상기간이 존재했던 과거에는 ‘초인종 협상’이 유명했다. 우선협상기간이 끝나는 밤 12시에 집 앞에서 초인종을 눌러 즉석 협상 테이블을 차리는 방식이다.

KIA 스카우트 김경훈 팀장은 2003년 11월 24일 오후 11시50분 대구광역시 한 아파트 앞에 서있었다. 12시에 초바늘이 멈추는 순간 마해영의 집 초인종을 눌렀고, 인근 카페에서 도장을 찍었다. 이듬해 김재현도 서울 청담동 아파트로 찾아온 SK 스카우트 실무진과 즉석 협상을 통해 FA계약을 맺었다.

그러나 초인종 계약은 종종 탬퍼링의 연막으로 악용되기도 했다. “밤 12시가 지나자마자 감독님께 전화가 왔다. 큰 감동을 했고 사인했다”는 한 선수의 소감이 나간 직후 정작 해당 감독은 “전화한 기억이 없다”고 말하는 촌극도 있었다.

SK 주장 김강민은 2014년 겨울, 현역시절 자신의 룸메이트이자 하늘같은 선배인 박경완 당시 육성총괄, 민경삼 단장과 아예 가게 문을 닫아버리고 늦은 시간까지 술잔을 기울이다가 “난 그렇지 못했지만 강민이는 ‘원팀 플레이어’가 됐으면 좋겠다”는 선배 박경완의 말에 도장을 찍었다.

지금까지 깨지지 않고 있는 사상 최초 FA 6년 계약의 주인공 정수근은 2003시즌 종료 후 FA 최대어로 떠올랐다. 정수근은 “이제야 공개하지만 사실 고속도로 휴게소에서 협상을 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이경호 기자 rush@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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