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항준 감독에게는 여러 얼굴이 있다. 1996년 영화 ‘박봉곤 가출 사건’의 각본가로 데뷔한 장항준은 2000년 드라마 ‘웬만해선 그들을 막을 수 없다’에 카메오로 출연하면서 연기에도 입문했다. 연출 데뷔작은 2002년 ‘라이터를 켜라’. 장항준 감독이 연출과 동시에 단역으로 출연도 한 작품이다.
이후 장항준 감독은 연출가, 각본가, 배우를 오가며 왕성하게 활동했다. 유쾌한 이미지와 재치 넘치는 입담 덕에 라디오에서도 게스트로 많이 찾았다. ‘무한도전’ 등 예능 프로그램에 얼굴을 종종 비춘 영향으로 예능인으로 아는 사람들도 있다. 혹자는 장항준 감독을 ‘유령’, ‘시그널’ 등을 집필한 스타 작가 김은희의 남편으로 부르기도 한다.
연출작보다 카메오 출연작이 더 많은, 독특한 필모그래피를 자랑하는 장항준 감독. 그렇기에 이번 영화 ‘기억의 밤’에 대한 기대와 관심도 더없이 높았다. 장항준 감독이 무려 9년 만에 선보이는 연출작이기 때문이다. “1년에 화를 내는 날이 많아야 사흘”이라는 명랑한 성격의 장항준 감독과 미스터리 스릴러 장르의 조합이라니. 이상하리만큼 화창한 겨울날, 장항준 감독을 만나 ‘기억의 밤’의 A to Z를 들었다.
Q. ‘기억의 밤’을 구상하게 된 계기가 궁금해요.
A. 2014년 연말이었어요. 송년회 도중 누군가가 ‘사촌형이 집을 나갔다가 한 달 만에 돌아왔는데 사람이 이상해졌더라’고 이야기를 시작했어요. ‘혹시 진짜 사촌 형이 아닌 거 아니야?’라고 받았고 즉석에서 점점 이야기를 붙여나갔죠. 얼굴도 목소리도 똑같은데 우리 형이 아닌 것 같다는 생각이 들면 어떨까 싶었어요. 다른 모임에서도 이야기해봤는데 재밌어하더라고요. 괜찮을 것 같았죠.
Q. 후반부 비극적인 스토리가 먼저일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전반부 스릴러 분량이 먼저 구상됐군요.
A. 네. 스릴러라는 그릇에 어떤 내용을 담을 것인가 고민했어요. 어떤 것을 이야기할 것인지가 중요하니까요. 1997년을 배경으로 설정해서 가족의 비극을 이야기해보자 싶었죠. IMF 당시 시나리오 작가로 데뷔했을 때라 사회인으로서 가정과 사회의 몰락을 생생하게 봤거든요. 누구보다 잘 알죠.
Q. 감독님과 스릴러의 조합이 쉽게 상상되진 않죠. 워낙 유쾌한 이미지로 알려져 있으니까요.
A. 뜻밖이라고 생각할 것 같아요. 저는 그런 게 좋아요. 험상궂게 생긴 사람이 아름다운 마음을 가졌을 때. 정말 매력을 느끼거든요. 그런 게 재밌죠.
Q. 시나리오는 얼마 만에 완성됐나요.
A. 1년 정도 걸렸어요. 홀가분하게 다 쓴 후에 (장)원석이에게 줬더니 계약하자고 하더라고요. 초고를 쓸 때부터 집 내부구조와 동선을 상상하면서 썼어요. 그림을 다 그려놓고 시작했죠. 그 과정이 참 재밌었어요.
Q. 극 중 상황처럼 사람이 최면에 걸린 채로 살아가는 게 과학적으로 가능한가요.
A. 사실 가능하지 않다고 해도 그대로 썼을 거예요. 아는 국과수 전문가를 통해서 최면 자문을 받았는데 ‘충분히 가능하다’고 하더라고요. 한 번 깬 사람에게 다시 최면을 걸면 이전보다 더 잘 걸린대요. 끝까지 못 빠져나올 수도 있고요. 정신 분석학자와 만나서 캐릭터의 심리 상태에 대해서도 자문을 많이 구했어요. 그런 확신이 있었기 때문에 장원석 대표(제작사 비에이엔터테인먼트 대표)에게도 ‘말이 된다’고 이야기했죠.
Q. 스릴러 클리셰가 원 없이 들어갔던데요.
A. 세상에 한 번도 없었던 장면은 없어요(웃음). 그리고 그것도 많이 섞어낸 거고요.
Q. 초반에 등장하는 의문의 여성에 다들 많이 놀랐어요.
A. 딸이에요. 진석의 무의식에서 나오는 트라우마의 결정체죠. 혼란을 주는 장치 중 하나이기도 하고요.
Q. 과하게 느껴지기도 하는 ‘친절한 설명’은 호불호가 갈릴 것 같아요.
A. 영화적인 논리로 풀고 싶었어요. 누군가는 설명이 많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빼놓으면 많은 사람들이 지적할 수 있는 것들이죠. 던진 떡밥을 회수해야 하니까 장황하게 이야기할 수밖에 없었어요. 정통 스릴러로 끝까지 같으면 훨씬 더 좋아했을 수도 있겠죠. 호불호는 어느 정도 예상하고 있어요.
Q. 문재인 대통령과 트럼프 미국 대통령의 뉴스 장면이 인상적이었어요. 흐름상 굉장히 중요한 장면이죠.
A. 원래는 진석(강하늘)이 대로변에서 차 사이를 뛰어가다 2017년 제품의 큰 광고판을 보는 장면으로 구상했어요. ‘혹성탈출’ 같은 느낌을 주고 싶었거든요. 그 장면 하나 찍는데 필요한 예산이 약 4500만원이었어요. 정해진 예산 안에서 해야 하니까 제약이 있었죠. 그래서 고민하다 뉴스로 바꾸게 됐어요. 외국 관객들은 우리나라 대통령을 모를 수도 있으니 모두가 알만한, 미국 대통령과 만나는 장면으로 넣었죠.
아, 비하인드 스토리가 있는데요. 시나리오 단계에서는 박근혜 전 대통령이 내려갈 거라고 생각 못했어요. 그런데도 시나리오에 ‘문재인 미국 방문’이라고 써놓은 거죠. 장미 대선 국면에 들어갈 즈음 리딩을 했는데 다들 그 지문을 보고 막 웃었던 기억이 나요. 그런데 영화를 촬영하는 사이에 실제로 문재인 대통령이 당선됐죠.
동아닷컴 정희연 기자 shine2562@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사진제공|메가박스 플러스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