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양형모의 공소남닷컴] 전수미표 악녀, 이보다 인간적일 수 있을까?

입력 2018-01-26 05:45: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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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테파니 황태자비 역을 맡은 배우 전수미가 2막에서 황태자를 향한 증오를 터뜨리며 솔로곡 ‘넌 내꺼야’를 부르고 있다. 사진제공|EMK뮤지컬컴퍼니

■ 뮤지컬 ‘더 라스트 키스’ 전수미

결혼과 동시에 버려진 ‘악녀’ 스테파니 역 맡아
고통 속 몸부림치는 똑같은 ‘인간’으로 그려내

서울 역삼동 LG아트센터에서 공연하고 있는 뮤지컬 ‘더 라스트 키스(The Last Kiss)’는 ‘황태자 루돌프’가 제목을 바꾼 작품입니다. 유럽에서야 황태자 루돌프의 이름을 모르는 사람이 없을 정도로(우리나라의 사도세자쯤 될까요) 유명한 인물이지만 국내에서는 아무래도 인지도가 떨어지다 보니(사람보다 빨간코 사슴이 더 유명하죠) 원제가 아닌 국내용 제목을 따로 만든 것이 아닌가 싶습니다.

실은 내용도 국내 초연(2012) 때와는 꽤 달라졌습니다. 황태자 개인을 중심으로 돌아갔던 스토리가 루돌프와 연인 마리 베체라의 안타깝고 비극적인 사랑 이야기로 변모했습니다. 그런데 오늘 공소남닷컴의 주인공은 루돌프 황태자도 마리 베체라도 아닌 스테파니 황태자비입니다. 정치적 이유로 황태자비가 된 그녀는 루돌프 황태자로부터 철저하게 외면을 당합니다. 황태자비는 점점 더 차가운 여자가 되어가고, 황태자는 아름답고 당찬 젊은 귀족여성 마리 베체라와 사랑에 빠집니다. 교황에게 이혼을 허락해달라고 편지까지 보냅니다.

스테파니 황태자비를 맡은 전수미 배우는 1980년생으로 옥주현, 최현주, 리사, 소냐, 문혜원 등과 동갑입니다. 2000년 대학 1학년 때 ‘아가씨와 건달들’로 데뷔를 했으니 무려 18년 차 배우죠. 기업에 입사했다면 부장님 연차입니다.

전수미는 스테파니 황태자비를 꽤 흥미로운 인물로 그렸습니다. 그저 얼음장 같이 차갑고 성질이 더러운 악녀가 아닌, 삶의 통증에 하루하루 몸을 뒤채며 살아가고 있는 똑같은 ‘인간’으로 살려냅니다. 다른 여자를 사랑하고 있는 남편의 뒷모습을 향해 표독스럽게 울부짖는 넘버 ‘넌 내꺼야’는 극의 후반부 마리 베체라와 성당에서 마주치는 장면에서 리프라이즈됩니다. 하지만 이때 부르는 스테파니의 ‘넌 내꺼야’는 뭐라 표현하기 힘든 감정을 묘사합니다. 마리 베체라의 ‘그 없는 삶’과 아름다우면서도 비통한 조화(혹은 대비)를 이루죠.

전수미는 이렇게 ‘악녀’ 스테파니 황태자비를 어딘지 고개를 끄덕이게 만드는 ‘그냥 여자사람’으로 만들어 갑니다. 스테파니 역시 청순하고 아름다웠던 시절이 있었습니다. 그 역시 정치적 이유와 가문의 이익 때문에 루돌프와 원하지 않는 결혼을 했습니다. 성당에서 마리에게 “그가 사랑하는 사람은 너지만, 그와 살고 있는 사람은 나야”라고 말하는 스테파니의 대사에서는 오만이나 과시가 아닌, 쓸쓸함이 묻어납니다. 그녀의 마음이 보이는 순간, 관객들의 눈가와 가슴에 진동이 울립니다.

뮤지컬 ‘더 라스트 키스’의 한 장면. 사진제공|EMK뮤지컬컴퍼니


마이얼링 별장의 침실. 루돌프와 마리가 마지막 키스를 나눕니다. 무대에 불이 꺼지고 잠시 후 울리는 두 발의 총성. 한 발은 마리, 또 한 발은 루돌프의 머리와 가슴에 박혔습니다.

그런데 그 두 발의 탄환이 자신의 심장에 박힌듯 평생 상처의 통증과 흔적을 안고 살아가야 할 사람은 따로 있습니다. 남았지만 남지 못한 자. 스테파니 황태자비입니다.

전수미란 배우가 그 사람을 보여주었습니다.

양형모 기자 ranbi@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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