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The Cup Of Life, 나의 월드컵] ⑫ 서정원 수원 감독 “후배들아, 첫 판에 모든 걸 쏟아부어라”

입력 2018-06-15 05:30:0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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수원 서정원 감독. 스포츠동아DB

한국축구의 월드컵 도전사는 2002년 이전과 이후로 나눌 수 있다. 2002년에야 비로소 첫 승이 나왔다. 이후 많은 스타가 탄생했고, 유럽 진출도 활발했다. 하지만 그 이전엔 유럽무대를 밟은 선수가 드물었다. 그들 중 프랑스리그에 진출한 서정원(48·수원삼성 감독)은 성공한 해외파였다. 스피드를 이용한 측면돌파가 주특기인 ‘날쌘돌이’는 1994년 미국월드컵 1차전 스페인전 동점골과 1998년 프랑스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한일전 동점골 등 축구사에 길이 남을 극적인 골로 강한 인상을 남겼다. 서정원의 월드컵 이야기를 그의 목소리(1인칭)를 통해 들어본다.


18일 아침의 `코튼볼구장`의 기적, 그것은 한마디로 `정신력의 승리`였다. 제15회 미국월드컵대회 스페인과의 C조 1차전에서 경기종료1분전 극적인 동점골을 터뜨린 서정원이 동료들의 포옹속에 두팔을 치켜들며 환호하고 있다.


● 1994년 스페인전의 추억


1990년 이탈리아월드컵 때 예비엔트리 멤버(2명)로 현장에 갔다. 당시에는 엔트리 멤버(22명)와 함께 이동하며 훈련도 같이 했다. 그 경험이 4년 뒤에 도움이 됐다.


994년 미국월드컵을 앞두고 우리는 준비를 많이 했다. 특히 2경기가 배정된 댈러스의 더위가 심상치 않았다. 당시 골대 뒤에 위치한 기자들은 카메라가 너무 뜨거워 수건을 얹어놓고 셔터를 눌렀을 정도였다.


더위에 따른 체력이 문제였다. 내가 1차전 스페인전에 선발이 아니라 후반 투입된 것도 이와 무관치 않다. 상대의 체력이 떨어질 때 빠른 발을 이용해 승부를 볼 요량이었다.


후반 초반에 2골을 허용해 패색이 짙었다. 우리는 불같은 투지를 발휘했다. 그날은 진짜 자신이 있었다. 몸도 가벼웠다. 오른쪽 측면을 쉽게 무너뜨렸다. 그러다보니 욕심도 많이 냈다. 우리가 한골을 따라붙어 1-2가 된 경기 종료 직전, 나에게 마지막 찬스가 왔다. 그 장면은 지금도 선명하다. 그 큰 무대에서 결정적인 찬스를 잡고도 결코 당황하지 않았다. 골문 앞 오른쪽에서 잡으면 대개는 왼쪽 대각선으로 때리기 마련인데, 자신감이 넘친 나는 그 순간 골키퍼를 속이고 싶었다. 골키퍼의 몸은 왼쪽으로 조금 기운 상태였다. 오른쪽에 좁은 공간이 보였다. 바로 거기였다. 침착하게 오른발 인사이드로 밀어 넣었다. 그물이 출렁거렸다. 특히 기분이 더 좋았던 건 내가 생각한대로 골이 만들어졌기 때문이다. 큰 대회, 큰 경기에서 강심장이 됐다는 건 지금 생각해도 짜릿하다. 너무 기뻐 그날 한잠도 못자고 밤을 꼬박 새웠다.


경기 후 대통령, 국방부 장관과 통화하며 축하를 받았다. 그런데 장관께는 결례(?)를 했다. 그 해 봄에 군 입대한 나는 머리를 깎은 지 단 하루 만에 대표팀에 장기 소집됐고, 그 후 월드컵이 끝난 뒤에 복귀했다. 그래서 군대용어인 ‘다나까’를 배우지 못했다. 그러니 “네, 안녕하세요” 등으로 인사했던 기억이 난다.


극적인 동점 헤딩슛 극적인 헤딩슛이 꺼져가던 승리의 불씨를 지폈다. 98프랑스월드컵축구 아시아지역최종예선 B조 3차전 일본과의 경기에서 후반 38분 번개같은 헤딩으로 동점골을 일궈낸 '날쌘돌이' 서정원이 골을 성공시킨 뒤 두주먹을 불끈 쥐며 환호하고 있다.


● 지금도 잊을 수 없는 도쿄대첩


1998년 프랑스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의 최대 고비는 일본전이었다. 1997년 9월 28일 일본 도쿄국립경기장에서 열린 한일전을 앞두고 모두들 긴장했다. 일본은 멤버가 화려했다. 자기들이 무조건 이긴다고 확신을 했다. 경기장에 들어섰는데, 관중석엔 빈자리가 없었다. 또 파란색 일색이었다. 위압감이 들었다. 골대 뒤쪽에 자그마한 붉은 색 무리가 눈에 들어왔다. 우리 팬들이었다.


우리가 먼저 한골을 허용했다. 다행히 내가 헤딩으로 동점골을 넣었고, 이민성이 결승골로 도쿄대첩을 완성했다.


골 넣고 우리 팬들 앞으로 달려간 이유는 적은 인원이었지만 뜨겁게 응원해준 게 너무 고마웠기 때문이다. 내가 어떻게 세리머니를 했는지는 모르지만 진짜 즉흥적인 감정이었다. 그게 통쾌한 표정이라고 하는데, 진짜 통쾌한 골을 넣었기 때문에 자연스럽게 나왔다.


한일전은 역사적인 경기다. 축구는 더 그렇다. 모두들 일본에는 지지 말아야한다는 생각뿐이었다. 그런 상황에서 골을 넣어 기쁨이 배가 된 것이다.


그 때는 우리 국민들의 축구에 대한 관심이 엄청났다. 경기 후 비행기를 타니깐 기장의 축하 코멘트를 시작으로 가는 곳마다 축하를 받았다. 공항에도 환영 인파로 넘쳐났다. 행복한 시간이었다.


수원 서정원 감독. 스포츠동아DB


● 황당한 일 때문에 실력발휘 못한 1998년


프랑스월드컵이 기대가 됐던 건 내가 프랑스리그(스트라스부르)에서 뛰고 있을 때 열렸기 때문이다. 리그에서도 좋은 평가를 받았다. 프랑스 방송에서는 한국팀 얘기만 나오면 내 얼굴을 내세우는 분위기였다. 나에 대한 기대가 컸다. 다행히 몸 상태도 좋았다.


그런데 참 우스운 일이 벌어졌다. 수두 때문에 컨디션 관리를 제대로 못했던 것이다.


프랑스 출국에 앞서 선수단 전체가 휴가를 받았고, 집에서 첫째 아이의 재롱을 보며 재미있는 시간을 보냈다. 출국 전날 소집돼 훈련을 하는 와중에 갑자기 몸이 가려웠다. 팀 닥터와 병원에 가서 진료를 받았는데, 아뿔싸 수두였다. 너무 황당했다. 비행기에서 선수단과 따로 떨어져 앉았다. 숙소에서도 혼자 방을 썼다. 더 난감한 건, 수두는 땀을 흘리면 안 된다고 해서 훈련을 하지 못했다. 1주일을 그렇게 보냈다. 컨디션이 좋을 리 없었다. 1차전 멕시코전에는 후반 25분경에 교체 투입됐다. 운동을 안 한 탓에 기대를 충족시키지 못했다. 2차전에 선발로 뛰었는데, 네덜란드에 5골이나 내줬다. 마음이 너무 아팠다. 그렇게 1998년 월드컵은 황당함 속에서 끝이 났다.


예선 탈락한 후 소속팀에 합류했더니 감독이 1주일의 휴가를 줘서 스위스로 여행을 갔다. 그런데 거기서 대규모 네덜란드 응원단을 만났다. 그 장면을 보는 순간, 갑자기 화가 치밀어 올랐다. 완패의 악몽이 되살아난 것이다.


● 후배에게 기회가 간 2002년


십자인대 부상으로 1999년 말 수술을 받은 뒤 2000시즌은 힘들었다. 2001년이 되면서 조금씩 좋아졌다. 리그에서도, 아시아클럽대항전에서도 괜찮은 플레이를 했다. 히딩크 감독의 대표팀에도 들락날락했다. 9월에 열린 나이지리아와 2차례 평가전(대전·부산)에 선발됐다. 그런데 2경기 모두 벤치에만 있었다. 당시 소속팀 감독께서 축구협회에 전화를 해 ‘출전시키지 않으려면 왜 차출했느냐’고 불같이 화를 내셨던 기억이 난다. 그게 히딩크와의 마지막 인연이었다. 서운한 건 없었다. 후배들이 많이 올라온 상황이었다. 후배들에게 기회를 열어주는 것도 나쁘지 않다는 생각을 했다. 나도 어린 나이에 대표팀에 뽑혀 10년 이상을 하면서 많은 경험을 했는데, 이제 후배들에게 그런 기회가 가는 게 맞다고 생각했다.


수원 서정원 감독. 스포츠동아DB


● 첫 판에 모든 걸 쏟아 부어라


월드컵 열기가 많이 죽었다는 느낌이 든다. 세계 최고의 이벤트이자 지구촌 축구팬들의 가슴을 설레게 하는 월드컵의 열기가 우리나라에서만 식은 듯해 안타깝다. 우리 팬들도 관심을 가지고, 응원을 많이 했으면 좋겠다.


결전의 시간을 앞둔 선수들은 자부심을 가져야한다. 월드컵은 누구나, 그리고 쉽게 나갈 수 있는 대회가 아니다. 치열한 경쟁 속에서 엔트리에 들었다. 탈락한 동료의 아픔도 있었다. 그런 걸 봐서라도 힘껏 뛰어야한다. 특히 첫 경기(스웨덴전)에 모든 걸 쏟아부어야한다. 90분 동안 축구인생을 건다는 각오로 뛰어 달라. 경기 후엔 절대로 후회가 남으면 안 된다. 아울러 팀을 위해 희생할 줄도 알아야한다. 그래야 우리 팀이 산다. 축구는 이변이 많은 종목이다. 첫 경기를 잘 싸우면 분위기는 확 바꿀 수 있다. 대한민국 축구 파이팅! <끝>


최현길 전문기자 choihg2@donga.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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