사진제공 | 신시컴퍼니
“뭔가 부딪치면 돌아서, 역으로 가라”
대학진학, 전문학원, 현장의 장점과 단점
“평소 존경하는 배우님을 직접 뵙게 되어 너무 영광입니다.”
꽤 늦은 시간이었음에도 스태프들이 분주하게 작업에 몰두하고 있었고, 벽 건너편에서는 주인공 아이다가 부르는 넘버가 들려왔다.
“어서오세요. 기자님, 정말 오랜 만이시네요.”
이날 인터뷰의 콘셉트는 뮤지컬 배우를 지망하는 꿈나무에 대한 선배 배우의 멘토링. 정준형 군은 최근 뮤지컬 콩쿠르에 나가 우수상을 받았다. 콩쿠르 무대에서 부른 넘버가 뮤지컬 헤어스프레이의 ‘런 앤 텔 댓(Run and tell that)’. 씨위드라는 이름의 노래 잘 하고 춤 잘 추는 흑인 고등학생이 부르는 넘버인데 2009년 국내 공연에서 최재림이 연기했다.
그러니까 이날은 씨위드의 넘버를 불러 상을 받은 뮤지컬 꿈나무가 ‘원조 씨위드’에게 한 수 가르침을 받는 날인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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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평소 존경하는’ 배우를 마주한 정 군은 바짝 긴장한 모습이었다. 최재림 배우가 “준형 씨, 편하게 궁금한 걸 물어보라”며 분위기를 느슨하게 풀어주었다.
두 사람이 편하게 대화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기자는 살짝 떨어져 앉았다. 가급적 두 사람의 이야기에 개입하지 않기로 했다.
인터뷰 기사 역시 두 사람의 대화를 가급적 그대로(가능하다면 숨소리까지) 옮기고자 했다.
뮤지컬 배우를 꿈꾸는 한편 대학 입시를 준비하고 있는 정준형 군의 사례가 비슷한 고민을 하고 있는 또래의 젊은 친구들에게 작은 도움이 되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이로 인해 중간 중간 문장에 매끄럽지 않은 부분이 있을 수 있기에 미리 독자들의 양해를 구한다.
꿈나무는 혼자서 풀지 못하고 끙끙대던 질문을 잔뜩 가져왔을 것이다. 최재림 배우는 부드러운 ‘형님미소’를 지으며 첫 질문을 기다렸다. 준형 군, 파이팅!
“(정준형) 한림연예예술고등학교 뮤지컬과 3학년에 재학하면서 대학 입시를 준비하고 있습니다. 노래를 본격적으로 배우기 시작한 것은 고3에 올라오면서부터이고요. 이번에 (콩쿠르에서) 씨위드의 넘버를 선택한 것은 같은 고등학생이기도 하고, 나이도 같고 해서였습니다. 그런데 미국적인 정서라든지, 또 씨위드가 성적인 농담도 많이 하는 역할이고 … 그런 게 노래로 가사로 들려야 하는데 어려움이 많더라고요. 음이 너무 높아서 발성을 꽂아야 하는데 … 그런 기분들을 노래할 때 잘 하는 방법은 없겠지만, 어떤 식으로 접근을 해야 잘 전달이 될지 고민입니다.”
“(최재림) 나도 처음엔 그랬어요. 난 성악을 전공했는데 뮤지컬을 시작할 때 비슷한 고민을 했거든요. 노래하는 거와 말을 전달하는 건 다르니까. 게다가 상황 연기도 해야 하고. 두세 작품할 때까지는 고생을 했던 거 같아요. 지금 와서 보니까 그래요. 사실 발성연습이라든지 이런 건 항시 해줘야 하는 거거든요. 음정 박자도 그렇고. 계속 연습해서 음악적 수준을 일정궤도에 올려놓으면 딱 고민하는 게 그거란 말이죠. 학생이니까. 당연히 챙겨야할 게 많잖아요? 음정, 박자, 소리내기, 멜로디에 가사도 외워야 하고. 하나하나 몸에 익숙하게 해야 해요.”
“(최) 노래 연습할 때 처음엔 멜로디. 다음엔 박자, 가사, 강세 … 이런 식으로 짚어줘야 할 부분들을 하나하나 습득하고나면 신경이 더 이상 안 쓰이게 될 때 남은 것들. 그러니까 내가 하는 말, 상황 이런 게 들어오게 되는 거예요. 준형 군이 고민하는 게 당연하죠. 어려운 것도 당연하고요. 나중에 자연스럽게 얻어질 것들이에요. 앞의 것들이 해결되고 나면.”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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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제가 입시생이다 보니 아무래도 동시에 잡고 싶다는 생각이 들게 되거든요. 시간이 많지 않은 것 같아 불안하기도 하고요.”
“(최) 그렇다면 연습을 더 많이 해야겠죠. 어떤 연습을 해야 할까. 내가 부르는 노래겠죠? 뮤지컬의 경우 대본을 보면 악보와 대본이 따로 있잖아요. 먼저 가사를 쭉 읽어보는 거예요. 악보랑 같이 봤던 것을 악보 빼고 가사만. 내가 무슨 말을 하고 있는지. 왜 이 말을 하고 있는지. 그때부터는 역으로 가보는 거죠. 가사를 읽고, 내가 왜 이 말을 하지? 또 장면을 보고, 왜 이 장면이 생겼지? 그 앞을 보고. 역으로.”
“(최) 아하! 초반에 이렇게 이야기가 시작이 되는구나. 난 이 안에서 이런 역할이구나. 거기부터 다시 정상적으로 돌아오는 거예요. 어떤 스토리를 통해 여기 와 있나. 크게 봐야 합니다.
한 곡만 딱 떼어놓고 하지 말고. 이 곡을 잘 하기 위해 이 곡이 어떻게 걸어왔는가를 보는 거죠. 준형 군이 부른 ‘런 앤 텔 댓’은 (씨위드의) 거의 첫 번째 솔로곡이죠. ‘난 이런 사람이다’하고 보여주는 곡이에요. 내가 생각하고 있는 것은 이런 것이라고 처음 말하는 곡. 그리고 씨위드는 내 생각을 자신있게 어필하는 아이거든요. 1차적으로 이런 분석이 깔리고 나면 세세한 디테일들은 연습하면서 생겨나게 됩니다.”
“(정) 어떻게 연습을 하면 좋을까요?”
“(최) ‘이런 식으로 연습해봐라’라고 얘기해줄 게 있다면 역시 역으로 가보라고 얘기하고 싶군요. ‘뭔가 부딪치면 돌아가 보자’ 하는 거예요. 자, 이거 하나가 있고, 또 이 노래 뒤에 펼쳐질 일들. 이 장면을 통해서 무슨 일이 벌어지는지 살펴봐도 좋고. 이렇게 되면 이 노래의 시작점을 둘러보게 되고, 노래가 끝나고 나면 어떻게 갈지를 알게 되니까 노래의 진행방향이 생기게 되겠죠. 이번엔 내가 질문을 하죠. 지금 예고 3학년 재학 중인데, 뮤지컬 배우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게 된 계기는 어떤 것이었나요?”
“(정) 고등학생이 되면서 진로 고민을 하게 되었어요. 공부를 잘 하는 편은 아니었고요. 고3이 되면 대학도 가야하고, 나중에 직업도 가져야 하는데 … 처음엔 ‘내가 잘 하는 게 뭘까’ 하고 고민했습니다. 그런데 없더라고요(웃음). 중학교 때부터 노래하고 춤 잘 추시는 분들의 영상을 많이 봤어요. 시작은 동경심이었죠. 나도 배우면 저렇게 될 수 있을까. 그래서 어머니에게 말씀드리고 입시학원을 다니게 되었습니다. 그렇게 5개월 정도 열심히 준비해서 예고에 진학을 했고요. 뮤지컬과를 다니면서 확연하게 뮤지컬 배우가 되고 싶다고 마음을 굳히게 되었습니다.”
“(최) 노래하고 춤 잘 추는 사람들의 영상을 봤다고 했는데, 아이돌도 아니고 뮤지컬 배우들의 영상을 봤다는 건가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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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정) 네에. 초등학교 때 선생님께서 수업시간에 뮤지컬 ‘영웅’의 영상을 틀어주신 적이 있어요. 그때 봤던 장면이 안중근 의사의 재판장면인데, ‘누가 죄인인가’ 넘버가 계속 머릿속에 맴도는 거예요. 그 후에도 기억에 남고. 그래서 유튜브를 많이 찾아보면서 ‘이게 뮤지컬이구나’ 하고 알게 되었죠. 유튜브를 보면 추천영상이 뜨잖아요. 그렇게 관련영상들을 다 보고. 그러다가 뮤지컬과에 들어와서는 과에 대한 자부심 같은 게 생기더라고요. ‘내가 해야 할 게 뮤지컬인 거 같구나’하고 확연하게 생각했고, 수업을 받으면서 확신을 갖게 됐습니다.”
“(최) 난 고2 때 성악을 시작했어요. 그러고 보니 준형 군이 나랑 비슷하네. 나도 공부에 관심이 없었거든요(웃음). 그렇다고 친구들과 매일 놀러 다닌 것은 아니고, 그냥 재미없게 학교를 다녔죠. 주로 만화책을 많이 보고, 친구들과 노래방을 자주 갔죠. 그러다가 고등학교 가서 ‘난 뭐하지?’하는 고민을 1년 정도 했어요. 결국 어머니의 권유로 성악을 시작하게 된 거죠.”
“(정) 어려서부터 노래를 잘 하셨나 봅니다.”
“(최) 성당 성가대 활동을 어려서부터, 길게 했어요. 주변에서 노래에 소질이 있다고들 얘기해 주었죠. 그렇게 대학에 가서 성악을 전공하게 됐는데, 클래식 음악이 훌륭하지만 뭔가 나한테는 딱딱하다는 생각이 들었어요. 마치 상자 안의 느낌? 몇 백 년 전에 작곡된 노래를 계속 똑같이 부르는 거잖아요. 뭔가 새로운 게 없을까 … 다양한 걸 하고 싶었어요. 무대에 서고 싶었지만 성악은 아니었거든요. 그래서 뮤지컬을 하게 된 거죠. 우린 시작점이 비슷하군요.”
“(최) 내가 지금 서른다섯이니 우리 나이가 16살 차이죠? 내가 겪어온 학창시절과 지금 준형 군이나 또래의 학창시절을 보면서 드는 생각은 … 어려서 자신의 꿈을 확실히 정하기 어려운 것은 사실이죠. 그 호기심과 아이들의 에너지를 모아줄 수 있는 게 나 때도 없었고 지금도 그런 것 같아요. 공부가 아닌, 삶의 활력을 받을 수 있는 … 에너지가 넘치니까. 연예인, 엔터 쪽이라든지 요즘은 개인 스트리머라든지. 자신들이 하고 싶은 걸 찾느라고. 그 선상에 준형 군도 서 있는 게 아닐까요. 난 좋은 현상이라고 봐요. 공부하고 경험하고. 눈은 계속 넓어질 테니까요. 대학 뮤지컬과를 가면 또 거기서 넓어질 거예요. 춤을 전공할 수도 있고 노래 혹은 연기일 수도 있고. 아니면 ‘난 무대를 만들 거야’. ‘작품을 쓸 거야’하게 될 수도 있는 거죠.”
“(정) 뮤지컬 배우가 되는 길은 여러 가지인 것 같아요. 대학에 진학할 수도 있고, 전문학원을 다닐 수도 있고, 또 현장에 바로 뛰어들 수도 있고. 각기 장단점이 있을 것 같습니다.”
“(최) 대학의 장점은 영역에 대해 넓게 배워볼 수 있다는 거겠죠. 예를 들어 역사도 배우고. 또 정기공연 같은 걸 하면 배우뿐만 아니라 스태프로도 참여해볼 수 있겠죠? 조명 메커니즘, 백스테이지 같은 걸 경험하게 될 테고 … 앙상블, 주연, 조연 다 해보고. 나이에 상관없이 넓게 경험을 시켜주는 장점이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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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최) 전문학원은 대학만큼 다양한 교육을 시킬 순 없어요. 특히 이론적인 면에서 그렇죠. 그러나 실기적으로는 개인에게 맞춰서 깊게 파고 들어갈 수 있다는 장점이 있어요. 마지막으로 현장은 … 역시 현장에서 배운다는 게 장점이겠죠. 하지만 이 모든 방법에는 단점들도 있어요.”
“(정) 단점이라면 어떤 것들일까요?”
“(최) 제 경험으로 봐서는 이래요. 대학은 말 그대로 너무 넓어요. 할 게 너무 많아. 그러다보니 개인의 특성에 맞는 교육이 힘들어요. 전체적으로 평균에 맞춘 수업을 할 수밖에 없죠. 한 명은 춤을 어마어마하게 잘 추고 한 명은 못 춘다면, 레벨을 평균에 맞춰서 수업을 하겠죠. 월등히 우수한 학생을 위한 수업은 없어요.”
“(최) 반면 학원은 폐쇄적일 수 있죠. 내가 경험할 수 있는 공간, 사람들과의 교류, 관계 … 이런 것들이 부족할 수 있어요. 또 너무 개인에게만 초점을 맞추다 보니 잘못하면 학생 혼자만의 생각에 빠질 수가 있습니다. 현장은 … 현장에서 배우는 게 완전히 정답은 아니라는 거. 어떤 현장이냐에 따라 다르거든요. 뮤지컬만 봐도 대극장, 중극장, 소극장 작품이 있고 대학로에서 공연하는 뮤지컬, 극단에서 올리는 뮤지컬, 일반인들이 올리는 뮤지컬 … 다 똑같으면서도 다르니까요.”
“(최) 특정 현장에서 배우는 게 … 처음 시작하는 신인 입장에서는 뭐든 설레니까 ‘이게 뮤지컬이구나!’할 겁니다. 그런데 잘 만든 공연, 잘 하는 스태프들, 동료 배우들 만나서 긍정적으로 할 수도 있겠지만 그렇지 못할 수도 있거든요. 시간이 흘러서 나에게 득이 될 것인가, 혹시 나쁜 습관이 되지는 않을까. 불확실성이 많죠.”
“(최) 개인의 준비가 많이 되어 있어야 합니다. 마인드라든지. 또는 퍼포먼스를 보고 스스로 판단할 수 있는 눈과 귀, 나의 목표. 이런 게 명확하고 깊을수록 스스로 판단할 수 있게 되는 거죠. 동시에 외부의견을 수렴하거나 거를 수 있는 능력 역시 갖출 수 있게 됩니다. 밸런스가 필요한 거죠. 어떻게 보면.”
(기사는 2편으로 이어집니다)
양형모 기자 hmyang0307@donga.com 기자의 다른기사 더보기